■제10화

출세를 못 하느니 큰 돈이라도 거머쥘 수 있는 역관에 관심이 있지 않았을까…….
몽린은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문득 그런 의심이 들어 고개를 저었다. 선친은 늘 이익과 도리는 함께하지 못한다고 하면서 지나친 물욕을 경계했었다. 조선의 유학자들은 그런 유교의 교리를 믿어서 부자가 없는지도 모른다. 몽린은 다두로 일하면서 비싼 조선의 찻사발에 홀려 가족과 이웃을 배신하고 심지어 도둑질을 해가면서 금전을 모으는 왜인을 많이 목도했다. 그가 본 일본은 부모형제보다, 사람간의 의리보다 금전이 더 소중한 아수라장이었다.

아버지처럼 유학을 배운 조선인들은 재물의 위험성을 알고 있었던 듯했다. 정호다완 같은 명품이 득세하면 인심이 멸한다고 믿어서 질박한 그릇을 그대로 사용하지 않았을까. 명나라 도자기는 삼채, 오채 등 화려한 색깔을 넣고 심지어 사발을 황금으로 장식했다. 몽린이 봐 온 조선의 도자기는 금박은커녕 기껏해야 단색 그림을 넣은 철화나 청화백자가 있을 뿐.
몽린은 좀 굳은 얼굴로 찻사발을 가리켰다.

“기실 이런 사발은 차를 마시거나 밥을 담으면 되는 것이지. 금박을 입혀서 명품이라 부르고 다실에 모셔두면 제 구실을 못하게 돼. 병신 그릇인 셈이지.”
“한데 왜인은 명물이라 하여 어마어마한 금전을 주고 사잖아?”
“이곳에 살아보니까 조선인과 왜인의 안목이 물과 참기름인 것을 깨달았어. 일본은 극단적으로 인공미를 추구하고 반면에 조선의 기물이 보여주는 것은 자연 그대로일 뿐. 정호다완도 일본인의 장기인 형식미가 만들어낸 신화이다, 그 뜻이야. ”

몽린은 앞에 놓인 가루차를 손으로 가리켰다. 한두 모금 마셨는지 차가 사발에 그냥 남았다. 강우성은 입안을 맴도는, 녹차 가루의 뒤끝이 싫은지 찹쌀떡을 우걱우걱 씹었다.
“이 차를 마시는 예법, 그들 말인즉 다도도 마찬가지야. 이것은 그저 찻물일 뿐이지. 막걸리나 숭늉 마시듯 훌훌 들이키면 되는데 왜인들은 수십 가지 절차를 정했어. 찻잔을 드는 법, 따르는 법, 닦는 법, 마시는 법, 법, 법, 법…… 그것을 다 배우다 보면 우리 조선인들은 숨이 턱턱 막힐걸?”
“그 말은 맞네. 차 한 잔 마시는데 웬 의례가 그리 번거로운지…….”
“그것뿐만 아니야. 여기다 차선일미(차와 참선은 같다)니 화경청적(모든 더러움과 욕심을 없애 일체가 화합하고 공경하는 단계)이니 온갖 미사여구를 붙여 굉장한 경지에 이른 듯 으스대고 있지.”
“으음.”
“한데 보시게. 그런 말을 하는 히데요시나 영주들은 글 한 줄도 못 쓰는 까막눈들이야. 평생 사람 죽이는 일 밖에 모르는 위인들이 다도의 성인이라는 센리큐 거사의 깨달음을 눈곱만큼이라도 알 것 같아?”
“왜인들은 내가 말차를 마시다가 인상이라도 찡그리면 차 맛도 모르는 하인배라고 비웃던데? 차 대신에 술만 마신다고 하면서…….”
“우리 조상들이 배우는 성리학에서는 사람의 성품으로 경(敬)과 성(誠)을 중시해. 이것은 참되고 진실한 마음가짐이니 유학자의 눈으로 보면 성인이나 고승의 경지를 흉내 내는 무장들의 다도회는 기망이지. 조선인들은 그런 헛짓을 꺼리니까 차를 내팽개치지 않았을까. 사람의 본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막걸리가 더 실답다고 본 것이지.”
“옳거니, 맞는 말일쎄. 나도 구수하고, 톡 쏘고, 달콤쌉싸래한 그 맛이 냉랭한 말차보다 한결 좋다네.”

옆집에서 유녀들이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담벼락을 넘어 들려왔다. 대낮부터 기녀를 희롱하는 소리에 몽린은 자기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쇼군이었던 아시카가 요시미츠가 지었다는 금각사라는 절에 가본 적이 있어. 짙은 나무숲 속에 금박으로 번쩍이는 절에 왜인은 탄성을 올렸지. 거기 정원에 있는 잡풀 한 포기, 돌 한 개까지 정교하게 일꾼들이 가다듬은 것인데 …… 내 눈에는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자연의 자태가 거의 없었어. 모두 새로 가다듬어 우리 눈에 아름답게 보이도록 꾸몄지. 즉, 일본에서 중요한 것은 자연 본연의 눈이 아니라 물건을 보는 자의 시선이야. 그래서 이 다도 같은 차를 마시는 일까지 절차를 가다듬고 정형화시켰겠지.”
“만일 조선인이었다면 원래 자연이 이룬 정원을 가만히 놔두었을 것이다…… 뭐, 이런 말인가?”
“맞아. 그래서 나의 증조부께서 세우신 소쇄원에는 인공미, 사람이 꾸민 흔적이 없을 것이야. 소쇄원도 금각사처럼 온갖 장식을 씌워 사치스럽게 바꿀 수 있었겠지. 하지만 내가 어린 시절에 선친은 나와 함께 소쇄원을 거닐며 늘 말씀하셨어. 자연은 곧 하늘이 낸 것이고 그 자체가 최고의 아름다움이라고, 그것을 인간의 눈에 맞도록 고치는 것은 허황된 짓거리라고. 그래서 소쇄원은 자연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지…… 대나무를 구불구불 돌아가는 오솔길, 시냇물이 고여 만든 연못, 그 위에 쌓은 담장, 노송을 지붕 삼아 지은 정자…… 거기서는 물이 저절로 모여 폭포수가 되고, 그 물이 절구통을 만들고, 물레방아를 돌리고, 논으로 흘러들어가 곡식을 자라게 했었어.”

“오, 소쇄원! 나도 여러 서책에서 그 정원을 익히 들었다네. 조선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이라고 하던데…… 이제는 불에 타 그 자취를 볼 수 없다니…….”
몽린은 말없이 문밖을 내다보았다. 아득한 기억 속에만 있는 소쇄원을 그려 보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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