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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뉴스 창간4주년 기획연재Ⅲ(소설)/소쇄원의 피로인(제11화)양진영 작가

■ 제11화

 “며칠 후에 쇼군을 보러 가면 일본의 자랑거리인 노(能, 가면 음악극)나 이케바나(꽃꽃이)를 보여줄 것이야. 노는 조선의 광대들이 장터에서 추는 탈춤인데 아무도 이렇게 하라, 저렇게 추라 하고 간섭하지 않아. 장구치는 고수는 악보도 없이 그때그때 떠오르는 대로 연주하고. 한데 여기 노는 심지어 우는 것도 간섭해. 이렇게 울어라, 저렇게 웃어라 하고 말이야. 죄다 스승이 가르쳐 주는 대로 해야 해. 그야말로 꼭두각시에 허수아비 놀이 같아.” “허허, 나원참!” 그토록 외형에 치우치면 인심이 공허해지지 않을까…….”

몽린은 다 마시고 난 찻사발을 천으로 닦으며 말했다. “이녁이 정호다완에 관심이 있는 듯한데…… 예서는 성과 맞바꾸는 그 그릇도 조선인에게는 가마 신령님이 구웠던 사발 중 하나일 뿐. 밥이나 국을 퍼 담는 그릇을 매일 빚던 도공이 어느 날 우연히 만든 것이 정호다완일 듯하네. 아마 그이가 불을 때면서 딴생각을 했을 것이야. 보통 때는 봉통(가마 아래쪽 칸)을 막아두고 가마 속 장작이 다 타기 전에 다른 나무를 연달아 넣어 그릇을 굽지. 한데 어쩌다 그날은 깜박하고 봉통을 열어 두었을 듯해. 장작 꾸러미 몇 개 넣고 한참 졸다 보니까 검부러기까지 타버렸네. 놀라서 재차 넣고 또 딴 꿈꾸고……

이렇게 장작이 몽땅 탄 뒤에 나무를 넣으면 정호다완처럼 누런 색이 나오거든. 다시 말해 타다 만, 불완전한 그릇인 셈이지. 왜인들은 정호다완의 누런 색을 신이 낸 색깔이라고 하는데 장작이 빨리 타는 바람에 잘못된 색깔이 나왔는지도 몰라.
즉, 그날 가마 안에서 우연히 구워진 그릇이기 때문에 누구도 정호다완을 다시 빚지는 못할 것이네.”몽린은 다짐을 하듯 말했다. 혹여 조선에서 정호다완을 구워 왜인들에게 비싸게 팔려는, 엉뚱한 망상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하려는 의도 같았다.  “알았네, 알았어. 나도 이제 좀 알 만하네. 가마 속에서 바람이 어느 방향으로 불지, 장작이 어떻게 탈지 아무도 모른다…… 요변에 따라 사발이 다를 뿐인데 유독 정호다완이 대명물이 된 것은 운 좋게 센리큐나 히데요시의 눈에 든 탓이다. 그런 말이 되겠네 그려.”
드러내지 않았지만 왜인들 사이에는 천하인들이 가진 것을 명물로 하자는 묵계가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다 보니 힘을 가진 자가 가진 것이 최고의 기물이 됐다. 히데요시의 주군으로 일본을 통치했던 오다 노부나가는 차솥, 향로, 고려다완 등 명기, 사십여 종을 소유했는데 모두가 큰 성과 맞바꿀 가격이었다. 후대에 가서 그 기물들은 노부나가가 사용했다는 이유만으로 신화가 됐다. 몽린은 대화를 나누면서도 자꾸 문밖을 내다 보았다. 동생인 혜란을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어찌 보면 맞는 말이야. 내가 다회에서 사용하는 도도야나 와리고다이 같은 조선 찻사발도 정호다완과 크게 다르지 않아. 어떤 그릇이 더 아름답다고 할 수 없어…… 어쩌면 정호다완의 우유 방울 같은 매화피에 무장들이 끌렸을 법해. 그 물방울은 가이라기 즉, 철갑상어 가죽이라는 뜻인데 무사들이 지니는 칼 손잡이와 칼집을 그것으로 만든다고 해. 매일 매만지는 칼과 같은, 선뜻한 느낌을 정호다완에게서 받았을지 모르지. 그 사발은 무력의 신불, 검의 신이 만든 것이다, 그렇게 여겼을 법해.”
돌연 강우성이 실실 웃었다. “그날 종사관 나리가 이녁이 가져온 정호다완을 보더니 희뿌연 쌀뜨물 자국 같은 매화피가 사기장이 흘린 정액이라고 놀렸다네.” “아하하하 …….”
둘이서 너털웃음을 터트리는데 맞은편의 다실 귀퉁이를 돌아오는 여인이 보였다.
나가지반(긴 속옷) 밖으로 드러난 가느다란 몸매가 늘씬한 미녀를 연상시켰다. 허리에 동여 맨 코시히모(기모노의 허리띠)가 풀렸다가, 되말렸다가 하늘거렸다. 가까이 다가올수록 붉은 입술, 가는 눈썹이 붓으로 그린 듯 아리따웠다. 실버들 같은 허리와 보얀 살결이 보기만 해도 어질해 강우성은 가슴이 먹먹하고 숨이 차올랐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데 그녀의 미색에 눌려 멍청히 바라볼 뿐. 꼭 서시 같구나 …….

그 처녀는 좀 찡그린 표정이었다. 언젠가 명나라의 궁중 화공이 그렸다는 화첩에서 서시의 초상화를 본 적이 있었다. 그녀는 오나라에 패망한 월왕 구천의 충신이 오왕 부차를 멸하기 위해 보낸 미녀였다. 지병인 가슴앓이로 간간이 얼굴을 찡그렸는데 그 모습까지도 아름다워서 처자들이 앞다투어 흉내 냈다. 그녀의 영정은 오래오래 강우성의 가슴에 남았는데 그런 서시와 닮은 여인이 앞에 서 있었다. 여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라버니. 절 몰라 보시겠소, 혜란이오. 여기 있는 몽린 오라버니의 누이 말이오.”
“세상에! 그때 그 어린 소녀가 이렇게 변했단 말이더냐.” 강우성은 자기도 모르게 들떠 소리질렀다.

열세 살에 처음 보았을 때는 아직 어린 티가 선연했다. 한데 스무 해가 지난 지금, 그녀는 더 이상 소녀가 아니었다. 중후하고 아리따운 여인네였다. 왜녀의 복장이었지만 깊은 눈매와 잔잔한 미소가 영낙없이 어린 시절에 보았던 혜란이었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방울방울 맺혔다.
“야스하루의 늙은 정실을 돌보는 시녀라고 들었는데…… 그 무슨 기구한 운명을 타고 나 혼인도 못하는 신세란 말이더냐.”
강우성의 눈에도 어느새 눈물이 맺혔다. 혜란은 일본에 오기 전부터 은개라는, 야스하루의 조선인 첩을 시중 드는 시녀 신분이었다. 은개는 본디 창암촌에서 혜란의 몸종이었다는데 야스하루가 두서너 달 동안 창평에 주둔했을 때 그의 눈에 띄어 수청을 들었다고 했다.
몽린의 기지로 혜란과 모친은 은개의 몸 시중을 드는 시녀가 돼 왜병의 겁간을 피했다던데…… 어쨌든 그 지옥도에서 몸을 보존한 것만으로도 천운이었다.
“오라버니를 처음 만났을 때가 생생하오. 오사카 시전의 장돌뱅이였던 그 시절 말이오. 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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