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2화

영주의 다두로 일하는 몽린 덕분에 그럭저럭 편히 지내 와 전쟁의 악몽과 참화를 좀 잊은 듯싶었다. 혜란은 얼굴에 얼룩진 눈물을 닦으며 미소를 보였다. 몽린은 안타까운 눈길로 누이를 보며 쯧쯧거렸다.

“야스하루의 아내가 지난해에 머리를 깎고 겐쇼인이라는 법명을 받아서 쿄토의 사찰에 은거 중인데 관례에 따라 이 애도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어야 한다네. 이 애가 무슨 잘못이 있어서 처녀로 평생을 살아야 한다는 말인가……. 이번에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는 돌아가야 하네. 못 가면 온 가족이 자결한다는 각오네!”

몽린은 섬뜩하도록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화를 낼 때는 눈초리가 날카로워 강우성도 어린 시절에는 함부로 대하지 못했었다. 고국에 돌아가려는 가족의 각오가 어지간한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언젠가 엄청난 거금으로 팔 수 있는 정호다완까지 내놓으면서 사력을 다하고 있지 않은가. 강우성도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말을 듣고 보니 참말로 처참하네. 혜란 누이가 무슨 죄가 있어 영영 비구니 신세가 돼야 한다는 말이던가. 죽어가는 노인을 위해 이렇게 아름다운 처자가 여생을 바쳐야 한다니…… 그것도 누이의 어린 시절을 통째로 작살 낸 왜놈의 부인을 위해서 말이야. 그 육시랄 것들! ”

감정이 격해진 감우성은 조선어로 험한 욕을 뱉었다. 몽린은 쉿! 하면서 입을 조심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혹여 조선인끼리 모여 밀담을 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리면 막부의 감찰 군사가 들이닥칠 수 있었다. 쇼군이 천황을 배알하려 후시미성에 머물고 있어서 수만의 군사가 인근에 깔려 있었다. 더군다나 조선에서 온 사절단이 가까운 사찰에 대기하고 있어서 조선의 간자로 오해 받을 수 있었다. 혜란이 능숙한 왜어로 말했다.

“우성 오라버니. 생각 나시오? 우리가 힘들 때 오사카 다리에 모여 부르던 노래 말이오.”

임진난 때 피납된 숫자는10만이 넘는다고 조선의 조정에서 추정했었다. 그들이 많이 모여 살았던 오사카와 인근의 사카이에는 피로인의 집단 거주지가 있었고 그곳의 다리는 고려교로 불렸다. 야스하루가 히데요시 유자의 부름을 받아 오사카성에 머물 때는 혜란과 몽린도 곧잘 고려교에 들러 밤을 새면서 피로인과 고향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혜란이 그때 부르던 노래를 상기시키자 강우성은 환한 얼굴이었다. 옛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라 다시 눈물을 글썽거렸다.

“암, 알고 말고. 그 노래나 한번 불러볼까. 하하.”
스무 해 전에 그랬듯이 혜란이 선창하면 강우성이 후렴을 받았다.

아르랑 아르랑 아라리요.
아리랑 철철철 배 떠나간다.
아르랑 아르랑 아라리요.
아리랑 배 띄워라 님 찾아가자.

어느새 둘은 주고받고 흥을 이어갔다. 창 밖으로 보이는, 조각구름이 사라진 하늘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높았다. 햇발이 따갑도록 솰솰 내리쬐었고 문밖에서 산새와 나비들이 갈마들며 하늘거렸다.

아르랑 아르랑 아라리요.
아리랑 얼시고 아라리야.
아르랑 아르랑 아라리요.
세월아 내 님아 가지를 마라.

몽린은 스르르 눈을 감았다. 모처럼 옛 노래를 듣자 지난 이십 년의 세월이, 회한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창평을 휩쓸던 군마, 창암촌을 덮은 검붉은 화마, 비명 소리, 고작 땅벌로 적과 대항하던 마을 사람들, 하늘 높이 타오르던 광풍각, 가시덩굴만 남은 소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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