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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알기3/담양의 인물(21)만덕 김대기

담양의 역사 인물(21)만덕 김대기(金大器, 1557-1631)

송강 정철에게 사사, 효자로 명성 자자
'이괄의 난'에 격분, 격문 띄우고 의사 모병

김대기의 자는 옥성(玉成), 호는 만덕이고 담양 대덕면 대곡에서 태어났다. 송강 정철에게 글을 배웠는데 천성이 총명하고 또한 장래가 촉망되었다.
열한 살에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애통해하며 성인처럼 예법에 따라 장사지내고 조석상식을 정성을 들여 하고 효도의 귀감이 되기도 하였다. 자라서 어머니가 별세하자 여묘 3년에 항상 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그 자리에는 풀이 돋아나지 않았다.

선조 8년(1575) 열아홉 살에 옥구(沃溝)에서 시행하는 향시(鄕試)를 보려고 가는 도중 신창진(新倉津)에서 나룻배를 타게 되었다. 나룻배를 기다리던 수많은 나그네와 선비들이 배가 나루터에 닿자 서로 먼저 건너려고 앞을 다투어 배에 오르니 만덕은 승선을 포기하였다. 
그런데 강 가운데에 이른 배가 기우뚱하더니 그대로 뒤집혀 타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물에 빠져 그대로 수중고혼이 되고 말았다. 여기서 만덕은 인생무상을 느끼고 또한 명예와 욕망의 어리석음을 깨달아 괴나리봇짐을 강물에 던져버리고 과거 볼 것을 아예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와 버렸다.
인조 2년(1624)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68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한 방울 이슬과 같은 여생이 한 번 죽은들 무엇이 아까울 것인가!” 라며 분연히 일어나 각 군에 격문을 보내어 의사를 모집했다. 
신유일과 함께 영광에 의창을 설치해 의곡 3천석을 모으고 의병을 조직하였는바, 난이 평정되자 모든 의곡을 완주부(完州府)에 바치고 해산했다.

연흥부원군(延興府原君) 김제남(金悌男,1562-1613)이 이이첨(李爾瞻,1560-1623)의 무고로 일어난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의 아들 영창대군 옹립 사건(광해군5년)인 계축옥사에 연루되어 화를 당하여 일족이 멸족한 뒤에 후환이 두려워서 아무도 접근한 자가 없었다. 
이때 만덕은 “비록 일시적으로 화를 당했으나 실은 죄가 없으니 어찌 일시적인 잘못으로 명가의 훌륭한 자제를 버릴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종손인 김천석(金天錫,1604-1673)에게 딸을 출가시키는 의리를 보이기도 했다.(광해14년, 1622)

<만덕의 시문>
바다 위에 파도소리 요란스럽고
산중에 구름이 끼어 날이 어두운데
인심은 산해보다 더욱 험하니
지사들은 마땅히 문을 닫을 때로다.

세상 길은 평탄과 험란이 있고
인심은 강하고 약함이 따르니
침체한들 어찌 족히 한(恨)하리야
천리는 진실로 일정하지 아니하다./ 만덕문집

만덕은 지역의 선비들과 교유하며 한운야학(閑雲野鶴)으로 평생을 마치니 참판 유최기(兪最基)가 그의 행장을 찬하여 후세에 남겼다. 선비들이 구산사우(수북면 나산리)에 모셨다. 
만덕 김대기가 남긴 유고를 모아서 후손들이 1915년에 이르러서 『만덕집』을 간행하였고 1974년에 중간했다. 그리고 광산김씨 만덕공파 종중에서 2007년에 한글번역본인 『만덕문집』을 발간했다.(자료출처 : 담양삼강록, 만덕문집) / 담양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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