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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담양천년 특별기획Ⅱ / 담양의 인물(3)석전 이최선 선생역사인물/ 담양이 낳은 조선말 위정척사의 선봉 ‘석전 이최선’

창평 장전마을 출신, 기울어 가는 국운회복에 앞장
아들 이승학-손자 이광수 3대에 걸쳐 외세배격 ‘의병활동’

 담양뉴스는 '2018 담양천년 특별기획'으로 <담양의 인물> <담양의 마을탐방> <추억의 우리동네> <담양의 근대건축물> <담양, 꼭 알아야할 100가지> 등 '담양 알기' 시리즈를 게재중입니다. 이번 호에서는  '2018 담양천년 특별기획 II' ‘담양의 역사인물-구한말 위정척사의 선봉 ‘석전 이최선’을 게재합니다.
<담양의 인물> 편에서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담양 지역사회 여러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던 담양의 인물을 발굴해 소개합니다. / 편집자 주

“대쪽 같은 기개와 충절의 고장 담양”

*사진=석전 이최선 선생의 고향 창평 장전마을

사람은 나고 자란 곳의 자연지리와 생태를 닮는 법.
온화하고 인정이 많은 담양인 들의 성품이 형성된 것도 다 이런 연유에서 이며 곳곳에 누정이 들어서고 시인, 묵객들이 모여 시단을 형성했던 것도 담양의 빼어난 풍광과 자연환경, 그리고 사람들의 넉넉한 인심에서 비롯된 일이다. 경치가 좋고 물자가 풍부하니 풍류가 발달하고 문화가 융성해지면 사람들의 성정이 여유롭고 넉넉해 질 수 밖에 없었던 담양, 담양 고을이다.
인문,사회적 상황을 볼 때 우리 담양은 기개와 충절이 넘치는 선비의 고장, 또는 의향(義鄕), 예향(藝鄕), 문향(文鄕)의 고장 이라고 한다. 유사 이래 대대로 이어져 온 대쪽 같은 담양인의 성품과 충의의 정신, 의(義)를 알고 예(禮)를 실천하며 시문을 꽃피웠던 옛 선조들의 정신이 지금까지 면면히 내려오고 있는 담양, 바로 우리의 자랑스런 고향이다.

역사의 기록이 전하는 고려, 조선시대는 물론이고 구한말 시기에도 담양은 어느 고장보다도 걸출한 인물들을 많이 배출했다.
조선말과 구한말을 전후로 담양지방에서는 선각자 고정주 선생이 영학숙, 창흥의숙을 개설해 교육 열기를 불어 넣었을 뿐 아니라 고광순 의병장의 빛나는 의병투쟁, 석전 이최선의 위정척사 및 외세배격 등 담양의 전통 명문 성씨들은 나라와 민족을 구하고자 하는 애국애족 활동이 적지 않았다.

 이 시기에 위청척사의 기치아래 활발한 의병활동을 펼쳐 대한민국 의병사에 빛나는 인물로 기록되고 있는 기삼연, 고광순, 기우만, 기산도 등은 노사 기정진의 사상을 이어온 노사학파에 속하는 이들이며, 이들 중 외세배격에 가장 앞장서면서 애국애족, 위민구휼에 나선 이가 바로 담양 창평의 석전공 이최선 선생이다.

* 사진 = 석전 이최선의 생가 ‘영서당’

석전 이최선은?

석전 이최선(李最善, 1825~1898)은 창평 장전마을 출신으로 그의 집안은 조선 3대왕 태종의 후손이다. 태종의 장남 양녕대군의 증손이자 순성군(順城君)의 서손인 추성수 이서(李緖)가 정치적인 사건으로 담양 창평으로 유배되고 유배에서 풀린 후에도 귀경하지 않고 담양에 눌러 살았기 때문에 자손들이 담양 곳곳에 정착, 뿌리내리게 되었으며 석전공의 집안은 장전마을에 정착했다. 이후 창평 장전마을은 태종-양녕대군-추성군 이서로 이어지는 계보 아래 석전 이최선과 그의 후손들까지 대대로 조선왕조 이씨 왕족이자 명문가로 세대를 이어가게 된다.

창평 장전리에 뿌리내린 그의 가계도를 살펴보면,
이최선(1825~1883)은 추성수 이서(李緖)의 12세손이며 슬하에 승학,승구,승서,승한,승태 등의 아들을 두었고 이중 기우만과 함께 장성의병 활동에 적극 참가한 장남 이승학(1857~1928)은 광수,돈수,명수,중수 등의 아들을 두었다. 승학의 장남이자 이최선의 손자인 이광수(1873~1953)는 을사오적 암살단을 조직해 암살에 나섰으나 사전 발각돼 사형을 언도받았다.

손자 이광수는 이혁, 이순 등 아들을 두었고 이최선의 증손자 이혁(1898~1977)은 1980년대 감사원장과 국무총리 서리를 지낸 기당 이한기(1917~1995) 박사를 장남으로 두었다. 따라서 석전 이최선의 고손자가 바로 이한기 전.국무총리 이다.
이한기 총리의 자녀와 손자들은 이후 대부분 학계에 진출해 교수,박사 등으로 활동하며 현재도 명문가의 맥을 잇고 있다.

노사 기정진의 愛제자 이최선,
‘노사학파’의 탁월한 제자 추존
위정척사, 의병의 선봉에 서다

석전 이최선은 선대 추성수 이서의 유훈인 “벼슬하지 말라”는 집안의 가훈대로 그 역시 고향에서 학문에만 힘썼으며, 15세에 노사 기정진(1798~1879)의 문하에 입문한 후 40년 동안 스승 노사를 가장 정성스럽게 모셨다.

그는 1862년 삼남지방의 민란으로 조정에서 삼정교구책(三政矯?策)을 구할 때, 6,000여자에 달하는 ‘삼정책(三政策)’을 지어 올렸으며, 병인양요(1866년)가 일어나자 호남의 종친들에게 격문을 돌려 의병을 모아 도성까지 진격했다. 또한 노사 기정진의 ‘외필(猥筆)’에 대해 기호학파의 거세 비판이 일자, 직접 ‘독외필(讀猥筆)’을 지어 적극적으로 스승의 학설을 변론하는 등 이최선은 평생 도학을 탐구하고 몸소 절의를 실천했다.

특히, 석전은 ‘삼정책’에서 삼정의 폐해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기강의 쇄신과 염치의 회복이 필요하며, 삼정의 말단을 시정하는 일보다 그러한 습속을 바로잡는 일이 급선무라고 강조했다. 또한 습속의 병통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인재를 얻어야 하는데, 인재를 얻는 근본이 바로 인재 선발을 엄정히 하는데 있고, 인재 선발을 엄정히 하는 근본은 언로(言路)를 열어주는데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언로를 열어주는 길은 이치를 밝히는 성학(聖學)에 힘쓰는데 있다고 강조했다. 삼정의 문란으로 피폐한 민중의 현실을 석전 이최선은 현장에서 지켜보면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태평세월의 흥겨운 노래는 가을언덕의 과부의 곡성으로 변했다. 민중은 한 푼도 포탈하지 않았는데도 상납은 해마다 쌓이고, 아전들은 수만금의 뇌물을 받았는데도 법령은 두어 달을 죄수로 가둔다. 포를 거두어 군번을 대신하고 한갓 쓸모없는 장부를 끼고 다니며, 사망한 자, 유리걸식한 자, 어린 아이를 군적에 올리니 한 몸의 군역이 혹 서너 번에 이르고 한 이름으로 대역함이 혹 예닐곱 번에 이른다.
피로와 병에 시달려 의지할 곳 없는 사람, 아들 없는 사람, 홀아비, 과부가 되어도 이를 하소연할 곳이 없고, 하늘에 무죄를 호소하려 해도 길이 없다. 살아서 헤어져 죽어 이별하고, 자신을 팔고 자식을 파니, 울부짖는 소리가 우레와 같아 화기를 도무지 찾을 수 없다.”

“청춘에 시부를 짓다가 흰머리에 경전을 궁구하니, 죽을 때는 학생이라고만 쓴다. 관직에 등용되기 전부터 극에 달해 농사의 어려움을 알지 못하고, 하루아침에 고을 원님이 된 뒤에는 욕심이 격동하니 어찌 농부의 고충을 돌아보겠는가. 이런 사람을 목민관의 지위에 앉혀두면 무기만 들지 않았을 뿐 도적이 될 수밖에 없다. 정치는 홀로 시행하지 못하니 인재를 기다려 시행해야 한다.
천하는 한 사람이 독재할 수 없고 천하의 정치는 한 사람이 운영할 수 없다. 삼정은 인재를 얻으면 걱정거리가 될 수 없다. 진실로 그 인재가 아니라면 하나의 일도 운영할 수 없거늘, 하물며 삼정 같은 폐단이야 어떻겠는가?”
 
이처럼 시대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지식인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하고자 했던 석전 이최선은  어려서부터 경서와 사서에 능통하여 과거시험장에 드나들었고 문장에 대한 칭송이 자자했다.

부친 이규형과 절친한 친구로 장성에 있던 당대 최고의 성리학자인 노사 기정진(1798~1879) 선생의 문하로 들어 가 제자의 예를 갖춰 40여년을 정성껏 섬겼다.
그는 스승의 문하에서 예법과 경전을 탐구해 학문적 역량을 축적했으며 특히 스승의 저술인 ‘외필’이 학계에 소개되어 유림들이 의혹을 제기하자 ‘독외필’을 지어 스승의 학설을 명확히 변호함으로서 노사학파의 탁월한 제자로 추존받기도 했다.

당시 노사의 제자는 대략 600명 가량 이나 되었는데 그 중 이최선이 스승을 변론하는 글을 지었으니 그의 의리정신이 남다름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사제관계의 돈독한 정은 이최선이 의병을 이끌고 강화도로 향할 때 노사가 전해 준 시 한 수에 잘 나타나고 있다.

“금성의 가을빛 이별노래 드리우고,
긴 채찍 주려하나 늙음을 어이하리.
종성이니 마땅히 의병을 주창하리,
경을 빗기는 것과 창을 휘두르는 것이 어느 것이 더한지.
해와 달이 황도에 걸려 있음을 볼뿐이니,
남아가 어이 푸른 도롱이 입고 누워만 있으리.
객중에 날아오는 기러기 만나거든,
한수가 잠잠해 파도 없다 전해주오.”

이에 이최선은 스승 기정진 에게 답시를 적어 올렸다.

“스산한 서풍에 칼을 잡고 크게 노래하니,
창황은 국사를 맞이하여 어찌하리오.
위기에 처해 성패여부를 내 헤아릴 바 아니오.
쾌히 죽은 의기남아 얼마나 되었던지,
이날에사 비로소 창의조서 받자옵고,
만년에사 겨우 도롱이를 벗었네.
스승께서 별지에 보내주신 은근한 뜻,
강화에 나아가 배를 댈 것을 흰 물결두고 서약하네”

*사진=석전 이최선의 유품(노사선생 만사 4수, 간찰)

석전은 병인양요를 당해 척양척사의 정신으로 의병활동을 주도했다. 그는 도내에 격문을 띄워 의병을 구암땅으로 모은 뒤 싸움에 임하고자 하는 사람을 맹첩에 서명하게 하고 곧장 서울로 달려갔으나 그들이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서양인들이 도망친 뒤였다. 석전은 성이 수복됐다는 보고에 기쁘기도 했지만 후일 또 다른 침략이 있을 것을 우려해 당시 실세였던 흥선대원군을 만나 인재를 얻는 일과 독서를 하는 일에 힘써 백성의 마음에 광명과 화합을 심는 것이 급선무임을 주장하기도 했다.

석전은 35세에 사마시에서 ‘일시(一詩)’과목에 2등으로 합격하여 증광진사가 됐다. 그 이후 40세에 초시에는 합격했으나 복시에서는 문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응시를 포기했다. 그러다 1874년 그는 50세의 나이로 왕세자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열린 증광회시에 응시했다가 낙방의 쓴 고배를 마시게 된다.
그는 한강을 건너면서 차고 있던 은도와 옥거울을 강에 던지면서 “다시는 이 강을 건너지 않겠노라”고 맹세했다고 한다. 국가경영에의 의지가 남달리 강했던 그였지만 매관매직이 성행하여 실력있는 인재를 몰라보는 시대에 분노하고 좌절했던 것이다.

고향으로 돌아 온 석전은 벽에다 ‘지팡이 짚고 산을 나서지 않을 것이며, 붓은 서울로 띄우는 편지를 쓰지 않으리라’는 최치원의 시와 ‘푸른 이끼 낀 황량한 돌밭 띠풀집에서, 여생을 밥이나 배불리 먹는 게 소원이라네’라 읊었던 두보의 시를 붙여놓고 1861년 마을 입구에 문일정(聞一亭)을 지어 지인들과 시를 읊조리며 세상을 마쳤다.

*사진=문일정

‘문일정’의 명칭은 석전이 정자를 짓고 이름을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의 스승 노사 기정진이 견일정(見一亭)과 문일정(聞一亭) 가운데 문일정을 택했기 때문이다.
노사가 쓴 <문일정기문>에 보면 ‘원래 이 정자를 지은 뜻은 사방 풍경을 바라보자는 것이 아니라 나보다 학문 높은 벗을 맞아 예전에 듣지 못했던 학문을 듣고자 했기 때문이다’며 노사는 문일정으로 이름지었던 것이다. 현재 문일정에는 민태호의 제액과 기정진의 창건기문이 남아 있다.

이렇게 정자를 짓고 시문을 논하며 살던 그는 1883년 어느 날 병에 걸려 눕게 된다. 절친한 친구가 비감어린 마음으로 편지를 보내며 위로를 하니 그는 웃으면서 “남아는 죽음을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 같이 여기나니, 어찌 아녀자 같은 모습을 하겠는가?”라고 말하고 평상시처럼 담소를 나누다가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하지만 그의 실천적인 의식과 행동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아들인 청고 이승학(1857~1928)은 송사 기우만의 문하에서 공부를 하다가 장성의병을 이끌던 그의 스승 기우만과 함께 의병활동을 펼쳤으며 그의 손자인 성균관 박사를 지낸 옥산 이광수(1873~1953)는 이기, 윤주찬, 민형식 등과 함께 을사오적을 암살할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과정에서 발각되어 사형을 언도받기도 했다.
이처럼 석전 이최선 가문은 담양 창평에서 3대에 걸쳐 구국 의병활동으로 이어져 오늘에까지도 우리들의 본이 되고 있다.

<석전 이최선의 생애>

조선 후기의 사상가, 성리학자, 교육자. 
병인양요 때 의병을 일으켜 한성부로 달려가 관군을 지원했고, 1877년에는 호남 지역에 대기근이 들자 가산을 털어 빈민과 걸인을 구제했다.
구한말의 독립운동가 서재필과 서재창의 이모부로, 그의 본부인 성주이씨는 이기대의 딸이며 서재필, 서재창 생모의 여동생이었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자는 낙유(樂裕), 호는 석전(石田) 또는 석전경인(石田耕人)이다. 노사 기정진(奇正鎭)의 문인이다.

석전 이최선은 조선 순조 25년, 양녕대군의 후손인 성리학자 이규형(李奎亨)과 김문기(金文基)의 딸 상산김씨(商山金氏)의 아들로 태어났다.
15세에 노사 기정진의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을 배웠으며, 1842년 어머니가 죽고 1852년에는 아버지가 사망했다. 1860년(철종 11년) 35세에 증광시에 합격하였으나 부모님이 계시지 않는 것을 가슴아파하여 다시 고향으로 되돌아왔다.
성주이씨 가은 이기대(李箕大)의 딸과 결혼하여 2남 2녀를 두었으나 상처하고 후처 평택 임씨(平澤林氏)에게서 1남 1녀를 두었다. 본부인 성주이씨는 화순 동복의 대지주 가은 이기대의 딸로 동복군수를 지낸 서광언의 처제였다. 또한 서재필, 서재창의 생모의 여동생이었다.

1863년 고종 즉위 후 삼정(三政)에 관한 구언이 있자, 〈삼정책〉을 지어 올렸으나, 담양군수의 방해로 조정에 전달되지 못했다. 제너럴셔먼 호 사건으로 병인양요가 터지자 호남의 종친과 친지, 친구들에게 격문을 돌려 의병을 모아 한성부에 올라가 관군을 지원했다. 1875년 문과에 응시 했으나, 시험과정에서의 폐단과 대리 시험, 부조리 등을 보고 과거를 단념하고 다시 고향으로 내려왔다. 1877년 호남 지역에 대기근이 들어 흉년이 계속되자 그는 자신의 가산을 기울여 빈민, 걸인을 구제했다.

저서로는 《석전문집 石田文集》 4권, 《독외필 讀猥筆》 등이 있다. 1883(고종 20)에 사망하니 향년 58세였다. 전라남도 장성군 진원면 고산서원에 배향됐다.
2016년에 (사)호남고문헌연구원이 한문본 ‘석전집’을 한글로 번역한 ‘석전집 역주’를 발간했다.

 

장광호 편집국장  dn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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