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그날 저녁 최 선생이 문인주 집에 강아지 진주를 끌고 와서는 버럭 화를 냈다.
“이 강아지 자네가 가져 온 거 맞지? 내가 우리 진주를 꼭 찾을 거니까, 이 강아지는 필요 없으니 다시 가져다주게.”
“진주 닮았지 않아요. 이 강아지에 정을 붙이세요.”
“듣기 싫어.”
최 선생은 그날도 진주를 찾아 얼마나 헤맸는지 흐물흐물 지쳐 보였다. 결국 문인주가 강아지 진주를 기를 수밖에 없었다.
 

세 번째 꿈, 소쇄원을 꾸미다

문인주는 검둥이 강아지 진주를 분양받아 온 며칠 후 세 번째 양산보의 꿈을 꾸었다. 그날도 그는 해설을 모두 마치고 피곤한 몸으로 광풍각 마루에 누워 있다가 얼핏 잠이 들었다. 일부러 양산보를 만나기 위해 해가 설핏할 때까지 원림 안을 서성이다가 광풍각에서 잠이 든 것인지도 모른다. 이날 양산보는 유건도 쓰지 않고 상투머리에 바지저고리 차림으로 일꾼들과 함께 괭이를 들고 지석천에서 돌을 쌓고 있었다. 그는 사흘 째 대나무 숲 개울 양쪽이 무너지지 않도록 촘촘하게 담을 쌓았다. 목도꾼 몇 사람은 대나무 숲 바로 위쪽 개울에 나무다리를 놓기 위해, 길고 튼실한 소나무를 베어 메고 내려오고 있었다. 양산보는 개울 두 곳에 나무다리를 놓을 생각인 모양이다. 꿈은 한 장면을 오랫동안 보여주지 않았다. 마치 영화 필름처럼 장면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앞 뒤 장면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지도 않았고 순간에 장면이 바뀌면 앞의 장면을 잊어버리기 일쑤였다.  
 
새참 때가 되었는지 창암촌 고개에서 하녀 둘이 머리에 새참 먹을 것을 이고 개울 쪽으로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하녀들 뒤로 양산보의 어머니 송 씨 부인과 새댁인 김 씨 부인이 따랐다. 송 씨 부인은 돌쟁이 아이를 업었고 얄캉한 몸매에 배가 부른 며느리는 첫째 아이의 손을 잡고 대여섯 발짝 뒤로 시어머니 뒤를 따르고 있었다. 이들 고부는 남정네들 일하는 곳에 좀처럼 얼굴을 내밀지 않다가, 오늘 처음으로 모습을 나타냈다. 양산보 어머니는 아들이 어떻게 원림을 꾸미는지 궁금해서 몸이 무거운 며느리를 채근하여 함께 구경을 나온 것이다. 새참을 머리에 인 하녀들은 임시로 건너지른 나무다리를 건너 대봉대 앞에 음식을 내려놓았고 양산보 어머니와 김 씨 부인은 개울 건너편 멀찍이 멈추어 섰다. 양산보가 어머니를 발견하고 서둘러 개울을 건너자, 두 아이들이 큰 소리로 아버지를 외쳐댔다.
“아랫것들을 시키지 않고 ...어머니께서 여기에 어쩐 일이셔요?”

서둘러 단숨에 계곡을 건너온 양산보가 어머니를 맞았다. 양산보 어머니가 등에서 내려달라고 보채는 둘째 자징을 땅에 내려놓자, 아기는 뒤뚱뒤뚱 걸어 아버지 가까이 다가갔다. 첫째 자홍은 어머니 손을 잡은 채 아버지에게로 다가가는 동생을 멀뚱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양산보가 둘째 자징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개울가에 담을 쌓고 나서 두 곳에 죽교를 놓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기 오동나무에서 이쪽 개울까지 햇빛이 잘 드는 곳에 담을 쌓을 생각입니다. 담을 쌓으면 어머니께서 해바라기하시기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저기에 어머님이 좋아하시는 살구나무랑 매화 복숭아나무도 심겠습니다.”
양산보가 손으로 이곳저곳 손짓으로 가리키며 어머니에게 설명을 했다.
“그나저나, 집에서 여기까지 새참거리를 가져오자면 너무 힘들어서 어쩌냐? ”
어머니는 일꾼들이 둘러앉아 새참 먹는 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저 등성이에 줄을 매달아 음식을 내려 보내도록 할 생각입니다.”
“줄을 매달아서? ”
“두고 보시면 아실 것입니다.”
양산보는 웃는 얼굴로 말하며 애틋한 눈길로 부인을 보았다. 무거운 몸으로 산등성이를 넘어온 아내가 안쓰러웠던 것이다.
“참, 오라버니한테서는 기별이 없었소? ”

양산보는 부인에게 처남 김윤제의 소식을 물었다. 과거에 급제한 김윤제는 방방례(放榜禮)에서 임금으로부터 홍패와 어사화를 받고 사흘간 유가행렬(遊街行列)을 마친 후, 며칠 전에 금의환향하였다. 김윤제가 금의환향하던 날 근동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성안마을에 가서, 홍패에 어사화를 머리에 꽃은 김윤제가 삼현육각을 앞세우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구경했다. 청이 날 노새에 몸을 실은 김윤제는 조상님 모신 사당에 인끈을 바치고 큰절을 올렸으며, 집안에서는 금의환향한 아들을 위해 거판지게 환영잔치를 베풀었다. 이날 양산보도 아버지 창암공과 함께 환영잔치에 다녀왔다. 꿈의 장면이 바뀌었다.

“기묘사화만 없었던들 너도 홍패에 어사화 꽂고 금의환향 할 수 있었을 것을...”
창암공은 아들과 함께 집에 돌아오면서 이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하면서 혀끝을 찼다. 이날 양산보는 가까이서 아버지 대하기가 죄스러워 자꾸만 뒤쳐졌다.
“차라리 그 때 네 소원대로 눌제 문하생이 되었더라면... ”
“아닙니다요. 소자는 정암 스승님 제자가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양산보는 고향에 돌아온 후 단 한 번도 정암 스승님의 제자가 된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혹여 오라버님과 약조한 일이라도 있남요? ”
“그것은 아니오만....”

부인의 물음에 양산보는 말끝을 흐렸다. 실은 금의환향하던 날 김윤제는 양산보에게 한양에 올라가기 전에 창암촌에 한번 들르겠다는 말을 했다. 양산보는 그 말을 믿고 은근히 처남을 기다리고 있던 터였다. 처남을 만나면 염치불고하고 별서를 지을 때 도움을 청할 생각이었다. 양산보의 능력으로는 그가 계획한 대로 원림을 제대로 꾸밀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지금의 처지로 아버지한테 도움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며느리와 두 손자들과 함께 모습을 나타낸 송 씨 부인은 일꾼들이 새참을 다 먹고 일어설 때까지 언덕배기에 서 있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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