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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알기1/담양이야기(25) 일제강점기 말일제의 만행2

담양이야기(25)일제강점기 말기 일제의 만행(어느 면서기의 증언)

●담양의 양곡 공출

담양의 양곡 공출(1944년 12월)

담양의 양곡 공출도 심했다.
각 농가에서 생산한 양을 거의 다 공출을 하라 하니 각기 식량을 감추기 일쑤였다. 그것을 면 직원들을 시켜 대창으로 찾아내어 빼앗아오도록 하는데 면 직원들만으로는 샅샅이 뒤져서 빼앗아오기는 어려우니까 군이나 도에서 일본인이 나와서 면서기들을 앞세워 찾아내도록 뒤에서 감시하고 감독을 하니 안 할 수도 없고, 별 수 없이 앞에 뛰어다니면서 열심히 하는 척하며 대창을 쿡 쑤셨다가 뒤집어서 빼내면 양곡이 묻어나오면서 밑으로 쏟아지니까 멀리서 보고 있는 일본인들은 알 수 없으니 없다는 손짓으로 신호를 하면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이렇게 면민을 생각해서 있는 것도 없다고 숨겨주었더니 한 사람은 “정회원이가 안경을 쓰고 다니기에 멋 내느라 쓴 줄 알았더니 실제로 눈을 못 보는 모양이야? 조금 전 저곳을 쑤셨을 때 틀림없이 묻어나왔을 터인데 없다고 손짓을 했다”고 흉을 보더라고 나에게 귀띔을 한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생각하고 없다고 했지. 대창을 뒤집어 빼서 벼가 땅에 쏟아졌을 테니 지금 가보소.” 했더니 다시 가서보니 벼 알이 땅에 쏟아진 것을 보고는 다시 와서 “미안하네. 자네는 우리들을 생각하고 한 것을...” 이렇게 도와주려고 하는 것을 도리어 병신이라고 혼을 잡아내는 농촌의 무뚝뚝한 인심들....

1943년까지는 이상과 같이 공출을 시키니 감추기만 하고 면직원들은 찾아내지 못하니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1944년에는 방침을 바꾸어 면에 임시검사원을 1명씩 배치해놓고 벼베기 한 볏단을 각 마을 앞에 전부 집결시켜놓고 한 집 한 집씩 마을 전체가 공동 탈곡시켜 즉석에서 전량을 매상했다. 그러면 그 농가는 검불만 차지하게 되는데 검불도 탈탈 털어서 벼알이 쌓이지 않게 감독을 하고 있지만 통이 큰 사람은 보는가 안 보는가 벼 알을 듬뿍 싸서 검불을 담은 사람은 식량을 해결할 수 있었으나 순진한 사람은 검불만 탈탈 털어 담아서 식량이 없어, 초근목피에 의존하고 어렵게 살아왔다. 
그뿐인가. 보리, 면화, 유기그릇, 송탄유까지 공출이요, 한우도 일소로 한 마리씩 키우고 있으면 공출, 도무지 공출 아닌 것이 없다. 젊은 사람은 다 데려가고 농우까지 공출이니 무슨 힘으로 농사를 지으라는 거냐?

1945년 2월에 온종일 비가 오더니 그날 밤 기온이 급강하 하여 보리가 전부 동사해버렸다. 이제는 다 굶어 죽겠다 싶더니 군에서 보리밭에 감자를 많이 심도록 권하면서 씨감자 한 가마니 구해오면 벼를 한 가마씩 보상해주도록 면으로 지시가 나왔다. 꿩 먹고 알 먹고, 전북 순창 등지로 가서 씨감자를 구해다가 재배했는데 그해 풍작을 이루어 감자만 먹고 살았다. 감자는 아무리 많이 먹어도 배탈도 안 나고 흉년 살기는 아주 좋은 식량이었다.

이렇게 감자 씨 한 가마에 벼 한 가마씩 보상을 해주니 꾀가 많은 사람은 감자 씨는 한 가마니인데 여러 사람이 교대로 왔다 갔다 하면서 벼를 백여 가마니를 가져갔다는데 이것이 들통이 나서 경찰서에서 소환장이 나왔는데 중병을 앓고 있다고 이불과 요를 두껍게 깔고 덮고땀을 뻘뻘 흘리고 누웠으니 못 데려가고 지나는데 옆에서 보기에 답답하였다. 언제까지 저렇게 누워있어야 할 것이냐? 했더니 다행이 8.15해방이 되니 그 사람도 해방이 되었다고 한다. 
※ 이 글은 당시 면서기를 했던 정회원 님의 증언이다. (출처: 담양향토문화연구회, 『50년대 격동기의 진상』)/ 담양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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