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94년 3월
(8화)

  보름달은 어김없이 산 능성이를 넘었다. 민경이는 문을 살짝 열어놓고 보름달을 바라보며 뒤뜰에 귀를 기울였다. 오라버니가 자기 방에서 나갔으니 덕령이와 함께 뒤뜰에 나타날지도 몰랐다. 아니, 오라버니가 덕령이를 데려오기를 바랐다. 민경이의 간절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보름달이 점점 중천에 가까워졌다. 밤이 깊어가는 이 시간이면 이미 오라버니가 와야 했다. 뒤뜰에서 얍, 얍, 소리를 지르며 대련을 해야 했다. 하지만 뒤뜰에서는 그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풀벌레 소리만 처량하게 들려올 뿐이었다. 이 시간까지 둘이 나타나지 않은 걸 보니, 덕령이가 마음에 둔 여인은 다른 사람은 듯했다. 뼈마디가 산산이 부서지는 느낌이었다. 
  
 달빛이 교교히 집으로 흘러들었다. 덕령이를 그리워하는 여심을 달빛이 더욱 자극했다. 저절로 가슴에 두 손이 모아졌다. 다소곳하게 합장하고 보름달을 보았다. 덕령이 오라버니의 마음이 나에게 오도록 간절히 빌었다. 보름달 안에서 덕령이가 웃고 있었다. 옆에서 인경 오라버니도 빙그레 웃고 있었다. 오라버니가 야속했다. 오라버니, 내 마음을 아시잖아요. 둘이 둘도 없는 단짝이라면서요? 어찌 단짝의 마음도 돌리지 못하시나요? 민경이는 오라버니에게만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덕령이에게는 그 어떤 하소연도, 덕령이가 아파할 그 어떤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민경이의 표정에 간절함이 점점 짙어졌다. 속절없이 시간만 흘렀다.
  
 민경이는 혼자 김칫국을 마시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는 오라버니가 둘이 가시버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덕령이를 집으로 데려왔을 것으로 짐작했다. 아버지가 덕령이에게 마늘 재운 꿀차를 내주고, 그 차가 민경이 때문에 절반 이상 줄어들었다는 것을 알았을 텐데도 나무라지 않은 걸 보고 아버지도 내심 허락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 정도는 말해주지 않아도 눈치챌 수 있었다.
  하지만 덕령이가 발길을 끊자, 아버지가 오라버니의 뜻을 거절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오라버니는 오래전부터 덕령이와 민경이를 혼인시키면 어떻겠냐고 했다. 아버지는 바로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가난은 둘째 치고라도, 기백이 너무 넘치고, 독선적이고 다혈질인 성격이 걸린다고 했다. 그런 덕령이에게 보내면, 민경이가 항용 기죽어 살지 모른다고 했다. 모난 성격이라 더 강한 자에게 화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걱정까지 했다. 굽힐 줄 모르는 강직함이 결코 나쁜 건 아니지만, 때에 따라서는, 전략적으로 고개도 숙일 줄 알아야 하는데, 덕령이는 그렇게 하지 못하는 성격이라 우려된다는 것이랬다. 하지만 민경이가 덕령이를 너무 좋아하고 있다고 하자 입을 닫았다.
  
 아버지는 민경이라면 껌뻑했다. 아버지는 가마나, 말 같은 탈것을 관장하는 사복시의 종4품 첨정이었다. 아버지는 퇴청해서 사모관복을 입은 채, 민경이를 가슴에 안고, 우리 공주님 잘 있었는가, 하고 민경이부터 챙겼다. 글공부까지 시켰으니, 아들을 선호하는 풍조와 대조적이었다. 아버지는 아무리 몸이 아파도 등청을 거르는 날이 없었다. 민경이가 고뿔에 걸리자, 자기가 아프다는 핑계로 등청을 하지 않고, 물수건으로 민경이의 이마를 훔치며 간호했다. 그렇게 애지중지 했던 민경이가 좋아한다는 단 한마디에 아버지는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민경이가 덕령이와 혼인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고 있다고 느꼈다. 하지만 요즈막에 덕령이 보이지 않자, 민경이는 아버지가 끝내 반대해서 그런 줄 알고 안절부절못했다. 
  아버지는 덕령이의 성격을 트집 잡았지만, 집안 때문에 반대했을지도 몰랐다. 아버지는 영감에 해당하는 종4품의 첨정이고, 덕령이 아버지는 가장 말단인 종9품의 참봉이었다. 품계에서만 열 단계나 차이가 났다. 대감 칭호를 듣는 아버지가 더 좋은 집안에 민경이를 출가시키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그런 마음을 덕령이에게 전했는지도 몰랐다. 애간장이 새까맣게 타들어갔다. 날이 밝으면 아버지에게 그랬냐고 따져 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안감이 가시지 않았다. 자리에 앉을 수가 없었다. 방에서 오래도록 서성이며 바깥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대문 여는 소리에, 민경이는 합장을 풀고 문을 열어 밖을 보았다. 오라버니가 멀쩡한 걸음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늦은 시간까지 돌아오지 않기에 주막에나 들른 줄 알았다. 민경이의 마음을 잘 아는데, 덕령이는 외면하고. 오라버니가 너무 속상해서 처음으로 주막에 갔으리라 짐작했다. 지금까지 오라버니는 주막이나 기방에 드나들지 않았다. 드나들었는지 몰라도 밤이 이슥해서야 집에 돌아오거나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돌아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번에도 역시 멀쩡한 걸음을 보니, 주막에 들른 것 같지는 않았다. 밀어를 나눌 여인이라도 생겼는지 몰랐다.
 
  “왜 이제 오세요?”
  민경이는 앵돌아진 표정으로 물었다.
  “어? 안 자고 있었네. 들어가도 돼?”
  방 앞에서 오라버니가 시치미를 뚝 떼고 말했다. 
  “제 마음을 잘 아시면서. 너무하세요.”
  덕령이 앞에서는 수줍음을 타지만, 오라버니 앞에서는 가식 없는 민경이었다. 오라버니가 방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민경이도 따라 앉았다. 오라버니가 이 시간에 방으로 들어온 건 처음이었다. 할 말이 없다면 굳이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민경이는 호기심과 기대감이 뒤섞인 표정으로 오라버니를 뚫어지게 보았다.
  “오다 보니, 누가 어귀에서 기다리던데, 네가 불렀냐?”
  오라버니가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그런 적 없는데, 누가 기다린다는 말이세요?”
  민경이 마음은 이미 부풀어가고 있었다.
  “그랬구나.”
  “누군데 그래요?
  “밭뙈기 한 뼘도 없는 빈털터리에, 홀어머니까지 모셔야 하고, 하인이 한 명도 없는 그야말로 허우대만 멀쩡한 놈이더구나. 그래도 한 번 만나볼래? 그래서 요 며칠 말도 못하고 끙끙 앓았다더라.”
  
 오라버니가 말한 그가 누구인지 민경이는 바로 감이 왔다. 덕령이 아버지가 벼슬은 하고 있지만, 워낙 가난했다. 풍수가 명당으로 점찍은 자리를 사고 싶어도 돈이 없어 사지를 못해, 덕령이 아버지가 조상을 그 자리에 몰래 묻었다. 그랬던 덕령이 아버지는 덕령이가 열네 살 때 돌아가셨으니 홀어머니와 살고 있는 건 당연했다. 민경이는 덕령이가 가난하다거나, 홀어머니를 모셔야 한다는 것은 귓등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하인이 없으면 자기가 밥 짓고, 하인처럼 일할 거라고 이미 작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덕령이가 어귀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말에 그동안 마음 졸였던 생각이 봇물처럼 터져, 인경은 오라버니 품에 안겨 엉엉 울고 말았다. 덕령이를 만나러 당장 뛰쳐나가고 싶은데, 그래야 하는데, 어인 일인지 울음이 먼저 터진 것이다. 민경이는 그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장광호 편집국장  dn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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