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장면은 다시 바뀌어 며칠이 지났다. 양산보가 일꾼들을 시켜 작은 석가산(石假山)을 만들고 있는데 아버지 창암공이 나타났다.
“오늘은 뭘 하는 게냐? ”
창암공이 돈대에 서서 개울 건너 아들한테 큰 소리로 물었다.
“조그만 석가산을 만들려고요. 못이 있으니 석가산이 필요하지 않겠는지요. 욕심 같아서는 좋은 수석을 모아서 쌓고 싶지만 구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서 그냥 개울에서 모은 흔한 돌로 쌓고 있습니다.”
“산이 없으면 몰라도 산속에 웬 석가산? ”
“원림이라면 반듯이 연못 가운데 석가산을 만드는 것이 유행이지요.”
아들의 이야기에 창암공은 무슨 말인가 하려다 말고 잠시 얼굴이 굳어지는가 싶더니 손짓으로 아들을 가까이 불렀다. 양산보는 서둘러 외나무다리를 건너 아버지가 서 있는 돈대 쪽으로 올라섰다.

“네 처남한테서는 아직 기별이 없느냐? ”
아들이 가까이 다가오자 창암공이 관심을 갖고 물었다.
“한양 올라가기 전에 한번 오겠지요. 헌데 사촌은 왜요? ”
“네 처남 한양 올라갈 때 너도 데리고 가라고 부탁하려고 그런다.”
“아버님, 왜 또 그러셔요.”
“금의환향 한 네 처남을 본 후로 애비는 잠을 통 못 잔다. 애비 소원이니 제발 너도 과거를 보거라. 네가 과거급제 하여 벼슬길에 나가는 것을 볼 수만 있다면 언제 죽어도 여한이 없겠구나.”

창암공은 아들한테 매달리듯 간절한 목소리로 애원을 했다. 아들을 김 진사 딸과 혼인시키기 위해서 출사하지 않아도 된다는 약조를 한 창암공이었으나, 김윤제가 과거에 급제하여 근동 사람들을 불러 거판지게 환영잔치 한 것을 구경하고 나니, 마음이 바뀌고 말았다. 그는 며칠 동안 잠을 못 이루고 고민을 하다가 마지막으로 아들을 설득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양산보에게 기대가 컸던 그로서는 쉽게 욕심을 꺾을 수가 없었다. 번듯한 풍신에 머리가 명석하고 생각이 바른 아들이 출사 한번 못해보고 초야에 묻혀 사는 것이 너무 아쉽고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산보가 과거급제 하여 벼슬을 살게 되면 한미해진 가문이 번창해질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그의 꿈이 물거품이 되는 것만 같아서 요즈막 그는 사는 낙이 없어졌다. 

“아버님, 죄송하나 제 생각은 변함없습니다. 불효자를 용서해주십시오”
“그렇다면 좋다. 애비의 간절한 부탁이니 과거급제만이라도 하거라. 벼슬살이는 하지 않아도 된다. 그것도 못하겠다는 것이냐? 그렇게만 해준다면 전답을 팔아서라도 별서 짓는 것을 도와주겠다. ”
 
창암공은 아들의 손을 잡아 힘주어 흔들며 간곡히 부탁했다.
“아버님, 이러지 마셔요. 아버님께서 아무리 닦달을 하셔도 저는 벼슬길에는 나가지 않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벼슬은 꿀맛과 같아서 한번 맛을 보면 빠져나오기가 어렵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권력의 아수라장에서 꿀맛을 즐기고 싶지 않습니다. 다시 말씀 드리지만 저는 이 골짜기 안에서 유학이나 연마하면서 평생 조용히 살겠습니다. ”

양산보는 아버지에게 단호하게 말하고 몸을 돌려세워 외나무다리를 건넜다. 창암공은 한동안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고산 정상을 바라보다가 깊은 한숨을 거푸 내쉬고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언덕으로 올라섰다. 외나무다리를 건너온 양산보는 고개를 돌려 언덕을 올라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마음이 아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버지 소원을 풀어주기 위해서 마음에도 없는 과거시험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아버지가 그렇게도 간절히 원하는 가문의 흥왕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람이나 가문의 성쇠는 운명에 달려있다고 믿었다. 세상이 좋아지고 천운이 도와준다면 자기 대에 못 이룬 것을 자식 대에는 이룰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양산보는 지금은 운명이 그를 비껴가고 있으니 조용히 은둔하면서 마음을 갈고 닦으며 사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다음날 김윤제가 양산보를 찾아왔다. 김윤제는 눌제 선생 밑에서 동문수학했던 석천 임억령과 함께 왔다. 양산보는 사랑방으로 손님을 모셨다.   
“사촌의 환영연회에 왔다가 들렀습니다.”
임억령은 양산보보다 7세나 연상인데도 자신을 낮추고 존대어로 예를 갖추었다. 양산보는 뜻밖에 처남을 통해 익히 들어왔던 임억령이 찾아와 준 것이 너무 고마웠다. 양산보는 처남을 통해 임억령이 시문에 뛰어난 선비임을 잘 알고 있었다. 임억령은 지난 해 봄 식년시에서 전책(殿策)으로 등과했다. 
“이렇게 누거에까지 찾아와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석천 선생께서 여덟 살에 지었다는 시까지 외우고 있답니다. ”
그러면서 양산보는 임억령이 8세 때 지어 산 속의 승려에게 주었다는 시를 읊조리기까지 했다.

    쪽박이 비니 마음 또한 비었구나
    내 산승에게 이를 말 있으니
    뒷날 방장산에 가을 오면
    함께 쌍계의 달이나 길어볼까 하오   

“부끄럽소이다. 치기어린 아이의 장난에 지나지 않습니다.”
“겸손이 지나치십니다.”
“참, 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 청송당기를 지을 때 청송을 만났는데 양공 이야기를 합디다. 정암 선생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사이라 하더군요.”
청송이라면 성수침을 말한다. 임억령의 말대로 양산보는 성수침 성수종 형제와 함께 정암 스승 밑에서 공부하다가 기묘사화를 만났다. 
“청송 선생은 열 살이나 연상이신데도 저를 동문으로 대우해주셨습니다. 저를 잊지 않으셨다니 고마울 따름이네요. 벌서 칠년 전 일입니다.”
“청송당께서는 참으로 키가 크고 체구도 우람하시더이다. 꼭 공자님 풍채를 닮으신 것 같았습니다. 아까운 인재가 초야에 묻혀 있다니 애석하고 안타까울 뿐이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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