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출 전야

<제27화>

“정사년(1617년) 8월 하순. 쾌속선을 빌려 오사카를 출발한 유명환은 야스하루의 거성인 오즈에 도착했다. 몽인을 비롯해40여 명의 조선인이 이번에 어떻게 해서라도 고국에 돌아가려 대기 중이었다. 정미년(1607년)에 여우길이 이끄는 쇄환선 편으로 귀국하려다 야스하루의 방해로 실패했었다. 이번에 돌아가지 못하면16년 전쯤 배를 훔쳐 귀국하다 발각돼 자결한 이엽처럼 전원 바다에 수장될 각오였다. 오즈의 외항인 야와타하마에 비싼 돈을 들여 배도 구입해 대기시켜 두었다.

오윤겸이 오사카를 떠나9월 하순쯤 히로시마에 도착하면 강우성이 호위용으로 판옥선 한 척을 이끌고 오즈에 오기로 했다. 몽린의 계획대로라면 쇼군이 직접 지시한 유시문을 가지고 오기 때문에 현재 영주인 와키자카 야스모토도 감히 거역할 수 없을 터. 쇼군의 명을 거역하면 곧 반역이고 가문이 단절된다. 강우성과 조선 전함의 호위를 받으며 시모노세키를 거쳐 대마도로 직행하면 스무 해를 염원했던 고국에 드디어, 돌아가는 것이다. 몽인과 함께 탈출할 조선인들은 들떠서 요즘 잠을 못 이루고 있었다. 
한데 배를 타고 오즈를 벗어날 날이 아직 한 달이나 남았다. 반면에 야스모토의 감시는 더욱 엄중해지고 있었다. 조선의 쇄환사가 히로시마를 지났다는 소식이 전해진 뒤부터 야스모토는 혹여 오즈의 조선인이 사신단과 접선하지 않을까 신경을 쓰는 눈치였다. 보름 전에도 몽인을 성으로 불러 몽린에게서 온 소식이 없는지 캐묻곤 했다. 다행히 야스모토는 칼 밖에 모르는 다른 영주에 비해 문신 기질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해서 하야시 라잔 등 유학자에게 유학도 배우고 시나 서예에 능해서 이제 갓 서른 살을 넘겼는데 벌써부터 무가의 시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덕분에 다른 영주들이 내렸던 이동 금지 등 강압적인 명령은 없었지만 야스하루의 지시로 조선인의 동태를 수시로 보고하는 모양이었다.

야스하루 부자가 이토록 조선인을 챙기는 이유는 바로 몽인이 운영하는 가마 때문이었다. 몽린은 일찍부터 조선으로 돌아가는 데는 돈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강우성이 귀국한 것도 그런 경우였다. 신축년(1601년)에 오사카 인근에 살던80여 명의 피로인이 자력으로 귀국했는데 함께 금전을 갹출해 배를 구입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들은 왜인에게 예속되지 않아서 돈을 벌어 모을 수 있었기 때문에 돌아갈 수 있었다. 
아니면 형조 좌랑이었던 강항 등 유학자처럼 왜인의 도움으로 탈출하는 방법도 있었다. 임진년에 일본에 납치된40여 명의 학자들이 일본 유학의 개조로 불리는 후지와라 세이카를 도와 사서오경에 일본어로 뜻을 다는 작업에 참여해서 무사히 돌아갈 수 있었다. 그 전까지는 왜어로 된 경전이 없어서 왜인은 유학을 배우지 못했다. 야스모토도 이 경전으로 비로소 유학을 배우게 된 셈이다. 히데요시 이후에 천하를 거머쥔 이에야스는 새 막부를 열고 무인을 억누르기 위해서 유교를 국시로 삼을 생각이었다. 그러려면 야스모토 같은, 유학을 배운 영주를 중용해야 해서 이번에 와키자카 가문도 막부의 거점인 에도 가까이로 이봉된 것이다. 이런 사례를 보아 온 몽린은 자력으로 귀국하려면 막대한 돈이 필요하다고 느꼈고 동생인 몽인을 시켜 조선에서 자기를 구웠던 사기장을 모아서 가마를 짓도록 했었다. 야스하루의 다두를 하면서 여러 도자기를 접한 몽린은 조선의 도자기를 구우면 막대한 돈을 거머쥘 수 있다고 보았다.
임란 전까지는 왜국에 백자를 굽는 가마가 없어서 싸구려 흑색 도기들만 유행했다. 백사기를 빚으려면 가마 속 온도가 최소한 1200도를 넘어야 한다. 일본 가마는 1100도를 넘기면 펑펑 화포 소리를 내며 터졌다. 당시 백자를 굽는 가마는 명나라와 조선에만 있었다. 조정에서는 비법이 적힌 책자를 사옹원이나 경기도 광주 왕실 가마에 긴히 숨겼다. 한데 그런 비법을 전수 받은 사기장이 피납돼 큐슈 일대에서 도자기를 굽고 있었다. 몽린은 그들과 접촉해 오즈 인근 산에1300도가 넘어도 거뜬히 견디는 가마를 짓고 순백자를 구워서 오사카 인근의 차 도구상에 팔았다.

“이도와키는 오즈 산이 최고라더라.”
한때 오사카 다인들 사이에서는 이런 평가도 돌았다. 그들은 신의 찻사발로 불리는 조선의 정호다완을 이도라 불렀다. 그 도자기의 굽에는 타락(우유) 빛깔의 물방울이 옹기종기 붙었지만 몽인이 구운 그릇에는 없었다. 하지만 다른 때깔은 이도다완과 비슷하다 하여 이도를 닮은 도자기 즉, 이도와키라 칭했다. 몽인은 그 도자기를 오사카에 싣고 가서 팔아서 지난 몇 년간 큰 금액을 모았다. 그 돈으로 격군을 포함해 백여 명이 탈 수 있는 큰 배를 사서 인근의 야와타하마 항구에 대기시켜 두었다. 야스모토를 속이려고 그 배에 이도와키를 싣고 멀리 나가사키까지 가서 팔려고 한다고 소문을 냈다. 몽인이 내는 조세가 막대해 오즈번의 재정에 큰 도움이 되니까 야스모토도 모른 척하고는 있는데 그 배를 타고 조선으로 바로 치빼면 어쩌나 전전긍긍할지도 몰랐다.

몽인과 사기장들은 영주에게 탈출을 의심 받지 않도록 조선의 전통인 굿이나 장례를 치룬다는 핑계로 인근 산에 모여 날밤을 새곤 했다. 굿장의 밤은 어우러지고 난장판이어야 제맛이다. 흐트러진 망아경에 설렌 아낙들이 서방님들이 쓸 탈을 챙기며 재재거렸다. 사자탈에 문둥이가면에 수리탈까지…… 서로간에 바꿔 써보며 호르르 깔깔댔다. 지화자 둥덩실 웃음꽃에 홀린 사내들은 흥을 돋울 오방신장기를 고른답시고 실없는 야로를 부렸다. 
하나, 둘, 셋이다, 발감개에 노루 가죽이 없는 자들이…….
유명환은 느긋하게 숫자를 세면서 손바닥으로 붉은 장구를 두드렸다. 그는 며칠 전에 몽린의 서찰을 가지고 오즈에 되돌아왔다. 몽인을 비롯해 모두 목이 빠지게 몽린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계획대로 막부의 대신을 만나게 될 것이며 유시문을 받아 낼 듯하다는 전갈에 울음을 터트리는 아낙도 있었다. 이제 한 달쯤 후면 지긋지긋한 왜국을 벗어나 꿈에서도 그리던 고향 땅을 밟게 될지 몰랐다. 그런 희망에 조선인끼리 모여 노는 밤이 더욱 뜨거웠다. 젓대, 해금, 피리가 제멋대로 어우러지고 시나위 가락에 맞추어 무녀가 바람을 타는 깃털같이 너울거렸다. 얼이 빠진 사내들의 눈총이 그녀의 남색 쾌자 자락을 따라 오르내렸다. 
“덩덩쿵, 따쿵…… 덩덩쿵, 따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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