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94년 3월
<제12화>

  “분명히 부탁이라고 하셨지요?”
  담양 부사의 강단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분명히 그리 말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그 조건을 수락하신다면 내 기꺼이 사향을 내드리겠습니다.”
  “조건이라니요?”
  능주는 귀에 신경을 끌어 모았다.
  “떡배 부모님이 위태롭다고 하셨지요? 죽고 나면 돌이킬 방법이 없다 하셨지요? 지금 우리 조선이 그런 지경입니다.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험천만한 형국입니다. 왜적에게 빼앗기면 되찾을 방법이 요원합니다. 죽은 사람 살리지 못하는 것처럼 영영 조선을 되찾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해서 또 말씀드립니다. 나라를 지키는 일에 앞장서 주십시오. 그렇게만 하신다면 내일 당장이라도 생향을 들고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떡배 부모님도 구하고 나라도 구하실 의향이 있으십니까?”
  
능주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덕령이의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속내는 여전히 기대감이 낮았다. 의병에 가담할 거면 진즉 했을 것이다. 고경명 장군을 따라 형과 함께 가담했으나, 돌아가서 어머니를 봉양하라는 장군과 형의 말에 따라 귀향한 덕령이였다. 형의 전사 소식을 들었음에도 복수하러 가지 않고, 홀어머니를 모셨다. 형의 몫까지 해야 한다며 시묘살이에 지극정성이었다. 그동안 숱하게 많은 이들이 여막으로 찾아와 출병을 요청했지만 시묘살이를 이유로 번번이 거절했기에 이번에도 거절할 것으로 보았다.
 
 “부사님!”
  덕령이가 다음 말을 잇지 않았다.
  “수락하시겠습니까?”
  “저도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조건이요?”
  담양 부사 말에 능주는 떡배를 힐끗 보았다. 떡배는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이었다. 능주는 덕령이의 조건이 무엇일지 궁금했다. 담양 부사가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제시할 것만 같았다.
  “아직 초장(100일장)도 치르지 못했습니다. 초장이나 마치고 기병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래야 마음 편히 왜적과 싸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덕령이가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공께서 출병하신다면야, 두어 달은 기꺼이 감수해야지요. 공의 결정에 천군만마를 얻은 듯하오이다. 내일 생향을 들고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담양 부사와 장성 현감은 그 후로 정세를 간단히 이야기하고 밖으로 나왔다. 담양 부사는 바자울을 나서기 전에 떡배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능주와 떡배는 바자울 밖으로 나가 두 사람을 배웅했다. 두 사람은 말에 올라타기 전에 환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장성 현감이 담양 부사에게 생향을 안 내줄 줄 알았다고 했다. 담양 부사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처음부터 내 줄 생각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상주가 너무도 간절히 원하는 눈빛을 보고 조건을 생각했다고 했다. 상주가 출병한다면 그보다 귀한 것인들 어찌 아끼겠냐고 했다. 장성 현감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리고는 떡배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떡배는 허리가 땅에 닿도록 두 사람에게 인사했다. 두 사람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자리를 떠나지 않고 서 있었다.
  
두 사람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능주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떡배를 보았다. 떡배는 감격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고, 눈시울이 불그스름했다. 내가 모신 분들이 이런 정도야. 능주는 표정으로 떡배에게 자랑했다. 떡배는 마치 능주 때문에 부모님이 살 수 있게 되었다는 듯 능주에게 연신 허리를 굽혔다. 능주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미소만 머금었다. 여막에서 나눈 대화를 떡배도 들었기에 굳이 말하지 않아도 덕령이나 담양 부사, 장성 현감의 인품을 오롯이 느꼈을 거라고 보았다. 능주는 잠깐이나마 담양 부사를 잘못 판단한 것이 면구스러웠다. 다음에 얼굴을 마주치면 어떻게 해야 하나, 잠깐 걱정이 스치기도 했다.

  “그칸데, 그 많은 분들이 왜 나리께서 기병하기를 바란답니꺼?”
  능주의 여막에서 촛불을 끄고 잠자리에 누운 떡배가 귓속말처럼 나지막하게 물었다. 덕령이가 들을 걸 염려한 것이었다. 능주도 말이 문 밖에 새어나가지 않을 정도로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향시에도 합격했지만, 힘도 장사고, 말도 잘 타고 활도 잘 쏜다네. 근방에서 모른 사람이 없당께. 빛고을 동쪽 장사로 날렸당께.”
  “그 정돕니꺼?”
  “두 말하면 잔소리제. 어디 씨름대회에 나리께서 나가신다면 다들 미리 기권한당께. 적수가 없어, 적수가.”
  “그래서 그렇게 권유를 했나 보네예?”
  “암만. 오늘 동상도 보았지만, 다른 날도 여막에 손님이 끊이질 않았당께.”
  “그건 그렇고예? 형님은 와 그렇게 석청을 따러 다니는교?”
  “아씨가 간절히 원해서 그라제.”
  “아씨가요? 아씨는 왜 그칸데예?”
 
 떡배 말에 능주는 고개를 돌려 떡배를 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떡배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는 게 보였다. 능주는 바깥소리에 잠깐 귀를 기울였다. 덕령이가 자지 않고 뒤척이는 낌새가 있는지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대장부의 기세가 느껴질 정도로 코고는 소리가 커다랗게 들려왔다. 깊은 잠에 빠진 모양이었다. 촛불을 끄기 전에 능주는 아래 여막을 확인해야 했다. 상주보다 먼저 잠을 잘 수 없기에 여막에서 촛불이 꺼질 때까지 지켜보며 지시를 기다렸다. 촛불이 꺼지고 코고는 소리가 울리면 그제야 잠자리에 들었다. 자리에 누워서도 한동안 아래 여막에 귀를 기울였다. 도중에 덕령이가 부를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코를 곤 이후에는 지금까지 한 번도 능주를 찾지 않았다. 틀림없이 오늘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능주는 행여 덕령이가 잠에서 깰까 봐 속삭이듯, 그동안 자기 혼자 생각해오던 연유를 들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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