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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종의 詩이야기/詩의 향기,삶의 황홀(19)

  추석의 어머니

  추석 잘 지내셨는지요? 차례 상 차리고 성묘 다녀오느라 바빴을 추석은 지났지만, 오늘은 이성복 시인의 「추석」이라는 시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이성복 시인은 경북 영천 출신으로 1977년 《문학과지성》이란 잡지로 등단한 뒤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 『남해 금산』 등 많은 시집을 냈습니다.

밤하늘 하도 푸르러 선돌바위 앞에 
앉아 밤새도록 빨래나 했으면 좋겠다 
흰 옥양목 쳐대 빨고 나면 누런 삼베 
헹구어 빨고, 가슴에 물 한번 끼얹고 
하염없는 자유형으로 지하 고성소까지 
왕복했으면 좋겠다 갔다 와도 또 가고 
싶으면 다시 갔다 오지, 여태 살았지만 
언제 살았다는 느낌 한번 들었던가 
                                                  -이성복, 「추석」 -이성복 

  첫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에서 이 세상을 '정든 유곽'으로 보고 그 속에서 투숙해 사는 우리 삶의 악몽과 치욕을 가장 내면적인 언어와 혁명적 감수성으로 보여준 시인이 이성복이었습니다. 너무도 공격적이고, 너무도 낯설고, 너무도 당돌하고, 너무도 이질적이어서 오히려 매혹과 간절함으로 젊은 시 지망생들의 시적 이상이 되었던 시인이 이성복이었습니다. 
  몇 년 전 『아 입이 없는 것들』이란 시집을 냈는데, 첫 시집의 비관주의가 이번 시집에선 훨씬 더 비관적인 데로 나간 듯 했습니다. 그럼에도 시인의 말대로, 말 못하는 것들, 입이 있거나 없거나 간에 말로 못하는 것들, 지금 살아 있거나 애초에 살아보지도 못했거나 간에 속절없이 불행한 것들, 존재한다는 그 이유만으로 속수무책 시달리고 끄달리는 것들의 속내를 솔직하게 들려주는 시인의 정직성은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그런 고통스런 존재들의 아픔을 탐구하던 시인도 바로 오늘의 시 「추석」 같은 데선 놀랍도록 아름다운 삶을 이야기합니다. 아마도 추석이라는 명절의 그 민족적 정서를 이성복도 어찌할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시 본문을 보면 보름달 환하니 밤하늘도 하도 푸르릅니다. 이런 밤엔 선돌바위 앞에 앉아 밤새도록 빨래나 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가슴에 물 한번 끼얹어 씻고 아주 자유자재로 지하 고성소(苦聖所)까지 왕복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천당에 오르지 못하고 지옥에도 못 떨어진, 천주교를 접할 기회가 없었던 사람이나 영세를 받지 못한 어린이, 이교도, 백치 등의 영혼이 사는 그곳까지 자꾸 갔다 오고 싶다고 합니다.
  
왜 그럽니까? 그 영혼들처럼 어쩌면 천당사람도 지옥사람도 못 되는 우리네 삶 때문에 "여태 살았지만/ 언제 살았다는 느낌 한번" 제대로 갖지 못한 채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이런 환하고 푸르른 날엔 우리네 삶도 흰 옥양목은 쳐대 빨고 누런 삼베는 헹구어 빠는 것처럼 정갈히 빨아 백 리까지 트인 한가위 달빛 아래 한번 활짝 드러내고 싶은 것입니다. 
  이 시에서 ‘옥양목’은 ‘누이지 않은, 그러니까 피륙을 잿물에 담갔다가 솥에 찌지 않은 무명인 생목보다, 발이 고운 무명의 피륙’을 가리킵니다. 빛이 썩 희고 얇지요. 이보다 품질이 낮은 것을 옥당목이라고 하지요.   


  다음은 역시 대구사람인 문인수 시인의 「달북」이라는 생소한 제목의 시를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문인수 시인은 1945년 경상북도 성주에서 태어나 1984년 《심상》지로 문단에 나왔습니다. 시집으로 「쉬!」, 「홰치는 산」 등이 있습니다.  

저 만월, 만개한 침묵이다. 
소리가 나지 않는 먼 어머니, 
그리고 아무런 내용도 적혀있지 않지만 
고금의 베스트셀러 아닐까 
덩어리째 유정한 말씀이다. 
만면 환하게 젖어 통하는 달, 
북이어서 그 변두리가 한없이 번지는데 
괴로워하라, 비수 댄 듯 
암흑의 밑이 투둑, 타개져 
천천히 붉게 머리 내밀 때까지 
억눌러라, 오래 걸려 낳아놓은 
대답이 두둥실 만월이다. 
                                                           -문인수, 「달북」
  
  위 시 「달북」은 달과 북을 합성한 말로, 시인이 만월을 그 변두리가 한없이 번지는 북으로 비유한 것이라는 걸 말씀드립니다. 그런데 그 달북은 ‘만개한 침묵’으로서 ‘소리가 나지 않는 먼 어머니’로 먼저 비유된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요. 어머니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평생을 살아오면서도 아무 말씀이 없으십니다. 만월처럼 가득한 사연을 가슴 속에 간직했지만 만월의 얼굴처럼 겉으로는 아무런 내용도 적혀 있지 않는 만월입니다. 
  그럼에도 만월은 고금의 베스트셀러처럼 누구나 바라보고 좋아합니다. 시골에 가서 만월 한번 쳐다봄으로 도시의 시멘트, 먼지, 소음에 찌든 영혼을 맑게 닦아버립니다. 만월은 읽어도 읽어도 다시 읽고 싶은 고금의 베스트셀러와 같습니다. 쳐다보아도 쳐다보아도 다시 쳐다보고 싶은 게 만월이기 때문입니다. 그 만월이 어머니입니다.
  
그런데 그 만월은 ‘덩어리째 유정한 말씀’입니다. 도시에서 사악함과 이기심에 빠져 허우적거렸던 마음을 온몸에서 우러나는 정으로 감싸 안아 우리를 새롭게 태어나게 합니다. 만면이 환하게 젖어 사통팔달, 통하게 하는 게 만월입니다. 재차 말하지만 그런 만월이 곧 우리네 고향의 어머니입니다. 
  그러한 만월도 암흑의 밑을 비수댄 듯 타개야만 천천히 붉은 머리를 세상으로 내밀 수 있습니다. 아무리 억눌러도 오래 걸려, 천천히 자라 올라서 두둥실 만월로 환할 수 있습니다. 어머니의 말씀의 북과 같은 인간을 이루려면 암흑을 깨야 하고, 또 억누르면 억누른 채로 인고하며 오래 걸려야만 만월을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시에서 ‘타개지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국어사전에는 나오지 않고 경상도 일부 지방에서 쓰는 말인데, 잘 익은 수박이 예리한 칼끝에 단번에 쫙 갈라지는 것, 또는 양쪽에서 팽팽히 잡은 천 끝에 가위를 대자마자 단번에 쫙 갈라지는 것을 가리킵니다. 우리 일상에서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방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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