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탈출전야

몽인은 못 들은 척 포구만 바라보았다. 먼 물마루 쪽에서 저녁 노을을 부르는 은빛이 번쩍거렸다. 해가 중천을 넘었으니 반각쯤 지나면 장이 파할 것이다. 소달구지 열 대가 넘는 그릇을 멀리서 싣고 왔는데 빈털터리로 돌아가야 했다. 현란한 노을빛이 해안선을 색동저고리로 물들였고 석양에 취한 격군들이 뱃노래를 흥청거렸다. 그 가락에 취한 몽인은 스르르 눈을 감았다. 
지난 스무 해 동안 겪은 일이 파도를 타고 넘나들었다. 세 살 때 돌아가신,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 여덟 살에 형의 손에 이끌려 납치됐던 일, 형에게 전해 들었던 아버지의 유훈, 소쇄원의 아름다움, 창평 학구당에서 배웠던 가르침……. 그것을 전해준 몽린 형을 아버지로 알고 믿고 따랐다. 배를 살 돈을 마련하기 위해 자신을 상인으로 내보냈던 형은 어렸을 때 아버지가 가르쳤던 훈계를 잊지 않도록 당부했었다.

남을 배려하면서 잇속을 차려라. 이기심을 버리고 함께 나누어야 인심을 얻는다. 지나치게 높은 이익을 부끄러워하라. 그런즉 이윤은 삼 할만 얹어 팔아라. 초과해 얻은 수익은 이웃을 위해 써라. 그것이 유교를 따르는 상인의 마음가짐이다…… 믿으니 사람이오, 서로 의심하면 짐승의 사이이다. 의상(義商)은 이익보다 신의를 우선시한다. 손해를 보더라도 약속을 지킨다. 그러나 배상(背商)은 신뢰를 배신하여 너를 망가뜨린다. 간상(奸商)은 이간질을 일삼고 속여서 너를 화나게 한다. 천상(賤商)은 나쁜 상거래를 부추겨서 너를 곤경에 빠뜨린다. 

몽인은 뭔가 결심한 듯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도덕률이 없는 왜국이 그런 장사치가 판치는 나라였다. 서로 속고 속이는 상거래가 당연시됐다. 동료 상인이 죽더라도 내 배만 부르면 그만이었다. 껄껄 웃고 시작했다가도 틀어지면 삿대질하며 욕설을 퍼부었다. 더 이상 얻을 것이 없는 상대는 박절하게 뿌리쳤다. 신의를 지키면 쓰러졌고 야비해야 살아남았다. 믿음은 외려 도려내야 할 악성 종기였다. 장사는 투전판이었고 이웃에 해가 되어도 나만 돈을 벌면 됐다. 

“자, 그릇을 그만 거두세.”
한참이 지나 몽인은 소리쳤다. 사람이 달라진 듯 목소리는 맑았고 눈이 예전처럼 초롱초롱했다. 
“아니, 이대로 가신단 말이오? 저놈들에게 실컷 우롱당하고.”
좌준이 퉁방울눈을 굴렸다. 이어서 산척패가 너나없이 악악거렸다.
“그러하오, 그냥은 못 가오.”
“소인도 억울해서 못 참겠소. 분풀이를 해야겠소.”
“맞소. 우리를 함정으로 밀어 넣은 왜놈에게 본때를 보여야 하오.”  

몽인은 벙글벙글 웃으며 한 켠에 쌓아둔 고리짝을 내렸다. 좌준은 화들짝 놀라 가로막았다.
“아니, 어찌하시려고? 놈들에게 헐값에 넘길 속셈이시오? 아직 정각쯤 시간이 있소. 기다립시다. 장이 파할 때쯤이면 놈들이 반드시 설설 길 것이오. 여기서 굴복하시면 아니 되오.”
곁에서 잠잠히 지켜보던 유명환은 주섬주섬 왕주발과 화병을 고리짝에 담았다.
“도편수 말마따나 서로간에 신뢰가 없는 상거래는 기망이나 도둑질일 뿐이야. 어서 돌아들 가세.”
“아무리 그래도 이대로 돌아가기는 섭섭하오. 여기 이도와키 서른 개면 우리들 살림이 두 배로 느는데.”
아직 미련이 많은 다방동은 애걸을 하다시피 했다. 동네 어귀에서 눈이 빠지게 기다릴 아내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그러한가. 그럼 이도와키는 남겨 두시게. 나머지만 담으시게나.”
몽인이 너무 선선히 답해서 산척패는 헷갈리는 눈치였다. 거참, 오늘따라 왜 저러시나, 하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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