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1592년 6월

  임진년 6월, 덕령이는 시숙과 함께 고경명 장군의 의병 소속으로 출정했다. 당시 민경이 시어머니는 위병을 심하게 앓고 있었다. 그런 시어머니께서 두 아들의 출정을 흔쾌히 허락한 것이다. 나라가 왜적에게 무참히 짓밟히고 있었으니, 사내라면 마땅히 나라를 구하러 나서야 한다는 생각에, 민경이는 아들 손을 잡고 의연히 배웅했다.
하지만 덕령이가 집을 떠난 그날부터 민경이는 틈만 나면 수리동산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았다. 수리동산은 시야가 탁 트인 마을 앞산의 봉우리였다. 시어머니께 아침상을 봐 드리고 수리동산에 올라 먼 곳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내려오곤 했다. 수리동산에서 보는 것과 집에서 들녘을 보는 것이 별반 차이가 없었다.

집은 동네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 마당에서 보아도 마을 앞에 드넓게 펼쳐진 ‘맞바우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들에는 한양이나, 남원, 순창, 장성에 갈 때면 반드시 지나야 하는 길이 있었다. 덕령이가 돌아온다면 그 길로 돌아올 것이다. 집에서도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는 들녘이지만, 한 치라도 더 멀리 보려고 민경이는 수리동산에 오른 것이다.
 
 여름이 무르익어, 신록의 나무들이 하나같이 푸르름을 뽐내고 있었다. 무등산에도, 추월산에도 녹음이 우거져 있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녹음 짙은 숲뿐이었다. 나무들이 뿌리를 내릴 수 없는 기암괴석만 녹색이 아닌 회색이나 옅은 검정색 같은 본연의 색을 띄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 뙤약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며칠 째 지독한 무더위가 이어졌다. 너무 강렬한 볕을 못 이긴 길섶의 풀들은 몸을 웅크리고 서 있었다. 오랜 가뭄과 뙤약볕은 식물도, 짐승도, 사람까지도 지치게 했다.
  
 민경이는 아침을 뜨고 집에서 나와 헐근거리며 수리동산으로 향했다. 온몸이 땀벌창이 되어 헉헉거리며 수리동산에 올랐다. 수리동산 가장자리에 아름드리 소나무 한 그루가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민경이는 소나무를 향했다. 소나무 그늘에 들어가도 땀이 멈추지 않아 연신 손부채질을 했다. 바람이라도 불어주면 좀 나을 텐데, 불지 않아 속옷까지 젖어 꿉꿉했다. 시지근한 땀 냄새를 날릴 수 없어 그대로 맡아야 했다. 민경이는 손부채로 땀을 식히며 마을로 이어지는 길을, 마을 쪽에서부터 훑어나갔다. 무더위 때문인지 행인은 보이지 않았다. 시선을 점점 멀리 옮기려는데, 비탈진 산에 늘어선 소나무 우듬지에 시야가 가렸다. 민경이는 소나무 그늘에서 벗어나 길이 멀리까지 잘 보인 곳에 자리 잡고 서서 길을 훑었다.
 
  점심때가 되어 집으로 돌아가 시어머니 밥상을 봐 드리고. 시어머니가 밥상을 물리자 상을 치우고 다시 수리동산으로 나와 북쪽을 보고 섰다. 덕령이를 기다린 것이었다. 일과였다. 연로한 시어머니도 두 아들의 생사가 걱정돼 민경이가 집을 나가 종일토록 기다리는 것을 나무람하지 않았다. 당신도 수리동산에 올라 아들을 기다릴 거라는 의지가 역력했다. 건강하다면 눈을 뜨기 무섭게 민경이를 재촉해 함께 수리동산에 올랐을지도 몰랐다. 아니면 동이 트기도 전에 혼자  집을 나설지도 몰랐다.
 
 뜨개질을 하고, 수를 놓고, 바느질을 하려 해도 도무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조총과 강하고 예리한 칼로 무장한 왜군이 부산에 상륙해 20여일 만에 서울까지 입성할 정도로 강하다고 했다. 왜군하고 붙으면, 도망가지 않는 한 대부분 전사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어찌나 왜군이 강한지 나랏님도 평양으로 도망쳤고, 조정을 분조까지 했다고 했다. 나랏님도 막지 못한 왜적을 물리치겠다고 집을 나섰으니 민경이는 일이 손에 잡힐 리 없었다.

 민경이가 바라는 건 오직 하나, 덕령이가 살아 돌아오는 것이었다. 민경이는 덕령이가 살아오기만을 염원하며 수리동산에 오른 것이었다.

장광호 편집국장  dnnews@hanmail.net

<저작권자 © 담양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