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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담양천년 특별기획Ⅱ / 담양의 인물(5) : 담양의 부자들

일제강점기 담양의 부자들
만석꾼 대지주 몇 명이 담양땅 전체 농지 40%소유
“내 땅 밟지 않고는 담양에 출입 어렵다”는 말 사실

당시 담양 최고의 대지주는 우송 국채웅 선생
논밭 1만 마지기 포함 담양땅 200만평 소유

(리드기사) 담양뉴스는 '2018 담양천년 특별기획'으로 <담양의 인물> <담양의 마을탐방> <추억의 우리동네> <담양의 근대건축물> <담양, 꼭 알아야할 100가지> 등 '담양 알기' 시리즈를 게재중입니다. 이번 호에서는  '2018 담양천년 특별기획 II' ‘일제강점기-담양의 부자들’을 게재합니다.
<담양의 부자들> 편에서는 일제강점기에 담양의 만석꾼 대지주로 위세를 떨쳤던 부자들의 농지소유 및 재산현황을 개괄적으로 소개하고, 이어지는 후속 특집을 통해 그중 몇 명의 인물탐방과 함께 전해지는 이야기를 게재합니다. / 편집자 주

“호남의 곡창지대 담양, 만석꾼 대지주 여럿 나와”

▲ 1920년대 담양 부자의 '행차'

사람은 나고 자란 곳의 자연지리와 생태를 닮는 법.
농지가 좋고 식량이 풍부하니 물류도 발달해 사람들의 성정이 여유롭고 넉넉해 질 수 밖에 없었던 담양, 지리적·역사적 상황을 볼 때 예로부터 담양은 호남의 곡창지대로 나라의 식량을 상당부분 책임지던 고장이었다.

일제강점기에도 비록 일본인들이 담양땅을 많이 강탈하고 식량을 수탈하면서 농민들을 억압했지만 그런 현실에서도 담양에는 조상에게 물려받거나 자신의 노력으로 자수성가, 재산을 모으고 지켜냈던 대지주들이 적지 않았다. 이들 중 일부는 일제에 협력하기도 했지만 드러나지 않게 민족을 사랑하고 애국활동에 도움을 준 이들도 있다.
당대 담양의 대지주 만석꾼들은 비록 재산도 많고 사회적 지위와 명예도 대단했지만 어떤 이들은 자신만을 위해 욕심을 부리지 않았고 과욕을 부려 소작농들을 착취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사회적 약자를 돕고 교육에 투자하거나 독립자금을 내놓은 사례가 적지 않았다.
이는 유사 이래 대대로 이어져 온 담양인의 성품과 애민정신, 의(義)를 알고 덕(德)을 묵묵히 실천하는 옛 선조들의 정신이 지금까지 면면히 내려오고 있는 담양, 바로 우리의 자랑스런 고향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당시 담양의 만석꾼 부자들은 누구이며 또 얼마나 많은 농지와 재산을 갖고 있었을까? 우선 떠오르는 인물은 예나 지금이나 지역 어르신들의 입에 오르내렸던 일제강점기 담양 최고의 부자였던 국 참봉, 바로 우송 국채웅 선생이다.
당시 그는 과연 얼마나 많은 토지와 자본을 소유한 부자였을까?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1920년대를 전후한 당시의 사람들은 담양을 출입할 때 국 참봉 땅을 밟지 않고는 출입이 불가능 하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으니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다.
국 참봉 외에도 담양에는 많은 부자가 살았고, 또한 광주를 비롯한 외지 사람들이 담양에 엄청난 전답을 소유했다는 사실도 전해지고 있다.
일제강점기인 1925년 첫 통계조사에 의해 작성된 담양지방의 대지주 전답 소유현황을 보면,  당시의 기록이 전하는 담양의 역대급 부자들은 15명으로 알려지고 있다. 담양사람 외에 광주, 순천 등 외지인으로 담양땅에서 대지주로 소작농을 거느렸던 만석꾼도 20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볼 때 당시 담양에는 대략 30여명 내외의 대지주, 만석꾼이 담양땅 대부분을 분할, 소유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당시 기록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담양사람으로 대지주에 이름을 올린 15명이 소유한 담양의 농지는 약 3,746정보 11,238,000평(56,190마지기/200평기준) 이었으며 외지인 대지주들이 소유한 농지는 약 5,557정보 16,671,000평(83,355마지기) 로 파악되고 있다.
이중 담양의 최고 만석꾼 부자는 우송 국채웅 선생으로 1만 마지기(약 200만평)의 농지를 가진 ‘담양 제1의 대지주’로 전해지고 있다. 국채웅 선생을 이어 정용준 씨가 9,500마지기(약 190만평)으로 거의 비슷한 수준의 농지를 가진 것으로 기록은 전하고 있다.

이외에 창평사람 고광일 씨가 6,780마지기(약 136만평), 창평사람 고이주 씨가 6,000마지기(약 120만평), 담양사람 정상호 씨가 5,200마지기(약 104만평), 담양사람 국정완 씨가 4,100마지기(약 82만평), 담양사람 정규연 씨가 2,700마지기(약 53만평), 담양사람 한대연 씨가 2,200마지기(약 44만평), 담양사람 정용인 씨가 1,800마지기(약 36만평), 담양사람 정인걸 씨가 1,680마지기(약 34만평), 창평사람 박진규 씨가 1,650마지기(약 33만평), 담양사람 국준호 씨가 1,620마지기(약 32만5천평), 창평사람 정명록 씨는 930마지기(약 18만6천평) 의 농지를 소유했던 알려지고 있다.

본지가 지난호 <담양의 고택> 편에서 소개한 담양읍 만석지기 김인기 씨는 고래등 같은 고택 외에 950마지기(약 19만평)의 농지를 소유한 것으로 알려졌고, <담양의 부촌-남촌마을>에서 소개한 만석꾼 국언진 감찰은 1,450마지기(약 29만평)의 농지를 가졌던 것으로 기록은 전한다.
위에서 소개한 이들 담양의 대지주 15명이 당시에 소유한 담양땅은 현재시점에서도 담양 전체 농지규모의 40%(11,238,000평) 가까이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돼 경지정리나 전용이 안 된 농지가 상당수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당시의 토지 상황으로 볼 때 거의 담양땅 농지의 절반 가까이가 이들 몇 명의 소유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다. 여기에 외지인 대지주들이 당시 소유했던 83,355마지기(16,671,000평)의 전답을 포함하면 당시 담양농지의 90% 이상을 이들 33여명의 대지주가 소유했던 것으로 추산된다.

▲ 호남은행(현 목포문화원)

이들 농지를 많이 소유한 만석꾼 대지주들은 당시 현금과 유가증권도 엄청나게 많이 가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은행업, 방직업, 주조업, 운송업에 투자하거나 직접 경영에 나서 사업적으로도 많은 돈을 벌었던 것으로 전하고 있다.
이들 중 가장 자본이 많았던 부호는 창평사람 고이주 씨로 해동은행 창립(조흥은행 전신) 주식 1,000주를 비롯 호남은행 창립(광주최초 민족계 은행) 주식 2,480주, 경성방직 창립(현 주.경방) 주식 500주 등을 보유한 것으로 기록은 전한다. 고이주 씨는 위에서 언급한 대로 당시 농지도 6,000마지기나 소유하고 있었다.

당시 담양의 최대 지주 국채웅 선생도 엄청난 농지와 자본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1940년에 우송농장 사장으로 120만엔(480억원)을 투자했다. 당시 1엔은 지금의 화폐가치로 약 40,000원 이다. 또 국정완 씨는 담양주조장(자본금 25만엔) 이사, 정용인 씨는 담양주조장과 경남상회 이사, 전남주조장 감사를 지냈으며, 정상호 씨는 운수창고업 경남상회 이사, 한 대연 씨는 남창정미 공장주로 경영에 참여했던 것으로 기록은 전한다.
이들 담양의 자본가들은 위에서 살펴본 대로 농지소유 또한 만석꾼, 대지주 들이었다.(이번호에 이어 다음편에 담양 최고의 부자 ‘우송 국채웅 선생’ 에 대한 특집을 게재할 예정입니다.) / 장광호 편집국장

▲ 담양 제1호 승용차, 대지주 국채웅의 자가용(1931년)
▲ 수확한 벼 근량검사(1944년)

 

 

 

장광호 편집국장  dn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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