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쇄원의 피로인
양진영 작가담양뉴스는 2019년 창간4주년 기념 『기획연재Ⅲ/소설』로 ‘2019담양 송순문학상’ 수상자인 양진영 작가의 걸작 장편소설 【소쇄원의 피로인】을 연재중입니다.
소설 ‘소쇄원의 피로인’은  제7회 송순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조선왕조 정유재란때 일본으로 끌려간 소쇄원의 주인 양산보의 후손들이 고향으로 되돌아오게 되는 과정을 사료를 바탕으로 그려낸 소설입니다. 양진영 작가의 장편소설 ‘소쇄원의 피로인’은 월2회 가량 지면을 통해 연재중입니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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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 마지막회> 귀환의 노래

몽린이 거의 자포자기 상태였던10월8일 저녁 무렵. 쇄환선이 결박된 이즈하라의 포구에 함성이 울려 퍼졌다.

갑판에 서서 종일 남쪽 바다만 바라다 보던 몽린의 눈에도 돛단배에서 나부끼는5호선이라는 글자가 선명했다. 쇄환사를 따라 다니던10여 척의 배 중 강우성이 지휘하던5호선이 분명했다.

무슨 사정이 있어서 원래 함선에 매달았던 기를 작은 돛단배에 달고 쾌속으로 달려오는 듯했다.오윤겸과 부사, 종사관도 유숙하던 류효인(流芳院)의 문을 박차고 우르르 달려 나와 손을 휘저으며 강우성을 맞이했다. 단숨에 배에서 뛰어내려 간 몽린은 강우성이 상관에게 보고를 마치자마자 소매를 잡아 끌었다. 한여름에 몇 달을 선상에서 지낸 탓인지 그의 이맛전이 구릿빛으로 물들었다.

“살아 돌아와서 정말 기쁘네! 왜국을 제집 드나들듯 하던 자네가 무슨 일인가?”
“오! 몽인 아우 소식이 궁금했겠지. 하하. 몽인 덕분에 내가 백 명도 넘은 피로인을 모집해 지금 이키섬에 두고 왔네.”
“정말인가? 몽인이는 무사하다는 말이지.”
“무사하다 뿐일까. 아우를 만난 것이 내게는 큰 행운이었네.”강우성이 몽인을 추켜세우자 몽린은 어리둥절했다.
“그건 또 무슨 말인가?”
“내가 히로시마에서 오즈로 가는 중간에 아우가 우리 배의 깃발을 보고 먼저 접근해 왔네. 같이 온 서른 네댓 명은 우리 배에 태워 먼저 이키섬으로 보내고 나는 아우 배에 승선해서 북큐슈를 훑고 다녔네.”
“오호! 그랬다고. 몽인이가 길잡이 역할을 했구먼.”
“길잡이뿐인가. 같이 다니는 산척패가 넉살이 여간 아니었네. 왜어도 능숙해서 가는 곳마다 조선인을 붙잡고 고향으로 가자고 꼬드겨서 백 명이나 모았다네. 정사 나리께 그 공을 아뢰어서 나중에 내가 한 턱 크게 내겠네. 하하.”
“그랬구먼. 그럼 몽인이는 지금 이키섬에 있는 것인가?”
“그래. 산척패와 함께 여섯 사람이 내일쯤이면 여기에 올 것일세. 이번에 우리가 데려 온 백여 명 피로인과 함께 말이야. 배가 커서 바람을 타야 하는데 오늘은 바람이 없어서 나만 먼저 온 게야.”
“그랬구먼. 스무 날이나 소식이 없어서 우리는 매일 밤을 설치며 기다렸다네.”
“하하하. 이제 다 끝났지 않았는가. 오늘밤은 밤을 새워 술이나 마시세.”

강우성의 활기찬 웃음이 해변가로 울려 퍼졌다. 몽인은 동생이 있다는 남쪽 바다를 향해 합장하는데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지난 스무 해의 회환이 파도를 따라 밀려왔다 떠내려가기를 반복했다. 이튿날 강우성의 말대로 피로인을 가득 태운 배 두 척과 몽인과 산척패가 탄, 작은 배가 이즈하라에 도착해 쇄환사 일행에 합류했다.

물귀신이 된 줄 알았던 몽인이 살아 돌아오자 어머니와 혜란은 한참을 얼싸안고 서로 울었다. 이제 하루 걸려 대마도의 최북단인 와니우라(鰐浦)에 도착하면 멀리 부산포가 보인다고 했다. 거기서 부산포까지가120리이다. 한나절만 항해하면 스무 해 동안 그리워하던 고향 땅에 도착하는 것이다. 모두 가슴이 설레어 뜬눈으로 밤을 지새며 덕담을 주고받았다. 

이윽고 10월16일. 북풍이 부는 묘시에 세견선을 포함해 열두 척의 배는 이즈하라를 떠나 와니우라에 도착했다. 멀리 우측으로 부산포를 감싼 산마루가 보이자3백 명이 넘는 피로인들이 혹은 오열하고 혹은 기뻐서 지르는 소리가 우레 같았다. 하루 더 바람을 기다려18일, 인시에 몽린을 태운 배는 바다를 가로질러 부산포로 향했다.

몽린은 기우뚱 요동치는 뱃전에 곧추서서 눈을 부릅떴다. 벌써부터 고향의 바다 내음이 불어오는 듯해 가만 선실에 머물 수 없었다. 
“자, 태종대가 보이오. 나와서 실컷 구경하시오.”
어느 선원이 피로인으로 꽉 찬 선실의 문을 활짝 열었다. 피로인들은 기다렸다는 듯 우르르 갑판으로 몰려들었다. 어슴푸레한 바다 안개에 덮여 멀리 보이는 육지가 희끗희끗했다.  
“저것 좀 보시오. 용오름…… 용오름이오.”

어느 아낙이 길게 외쳤다. 바다 구름을 뚫고 거대한 소용돌이가 하늘로 솟구치고 있었다. 그 물기둥은 바다에서 뜨겁고 습한 공기와 찬 바람이 부딪힐 때 생긴다. 그때 둘은 미친 듯 엉겨 돌아가고 검센 물줄기가 바닷물을 돌돌 말아 올린다.

하늘과 바다를 잇는 거대한 소용돌이가 앞길을 가로막고 선 모습은 뭔가에 화가 난 해신 같았다. 겁먹은 뱃사공들은 뱃전에 나부죽 엎드려 절을 해댔다. 한데 배에 무당이 탔는지 고수레, 고수레 하면서 웅얼거렸다.
“용왕님, 용왕님, 화를 푸소서. 고수레, 고수레…….”

조선에서는 굿이나 잔치를 열 때면 고시레, 하면서 음식을 떼어 던졌다. 주변의 귀신이나 미물도 같이 먹고 즐기라는 뜻에서. 그렇지만 살아있는 목숨도 배를 곯아야 하는 배에 귀신에게 줄 먹거리는 없었다. 안타까운 무녀는 뭔가를 던지는 시늉을 하면서 두 손을 바다에 흩뿌렸다. 곁에서 재재거리던 여인네들도 엉겁결에 따라 했다. 

“고수레…… 고수레…….”이웃끼리 어울리면 절로 흥이 나는 법. 오늘 하루가 즐거우면 그만이었다. 무녀는 신들린 어깨를 들썩이며 선창했다. 
오늘이 오늘이소서…… 매일같이 오늘이소서…… 
저물지도 새지도 말고…… 매일같이 오늘이소서……
고수레! 고수레!무당의 노래가 갈밭을 활활 태우는 불씨가 됐다. 고난의 세월을 지샜던 피로인들은 서로를 위로하듯 맘껏 가락을 뽑았다. 
오늘 노는 일이…… 오늘 하는 일이……
모두 하나가 아닌가…… 죄다 같지 않은가……
고수레! 고수레!

동토에서 그, 조선의 노래에 의지해 하루 하루를 견뎠던 피로인들. 몽린은 목이 메 말을 잊지 못하는 노인을 일으켜 세우며 후렴구를 불렀다.
오늘 놀지 못할까…… 어이 놀지 못할까……
이렇게도 맘껏 노세…… 저렇게도 맘껏 즐기세……
고수레! 고수레!아녀자들이 손을 맞잡고 헹가래질했다. 얼음장 같았던 유배의 땅을 잊으려고 몸부림쳤다. 몽린은 앞으로 나와 크게 외쳤다.

“이보시오들. 제 부친이 항용 말씀하셨소, 세상사 새옹지마요, 고진감래라고. 화와 복은 번갈아 오고 고생 끝에 낙이 온다 라는 뜻이오. 고난을 당해야 사람 사는 맛을 느낀다고 했으니 우리 귀양살이 좀 했다고 여깁시다.”몽린은 너덜너덜한 합죽선을 흔들며 소리쳤다.
“소쇄원을 세운 우리 증조부님도 유학께나 배운 학자요.

분이 늘 말씀하시기를, 오늘 즐거우면 내일 괴로울 수 있고 오늘 기쁜 일이 있으면 내일 슬픈 일이 닥칠 수 있다고 하셨소. 저는 동토에서 그 말을 등불 삼아 살았소. 현재를 고통스러워 하지도, 남을 탓하지도 않았소. 다시 고향 땅을 밟는 그날까지 노하지도, 서둘지도 않겠다고 맹세했었소.” 

몽린은 전장에 나선 장수인 양 합죽선을 높이 쳐들었다. 
“우리 공히 약조합시다, 왜국에서 그러했듯 조선에서도 묵묵히 살겠다고. 사기장은 부지런히 그릇을 굽고 농부는 농토를 가꿉시다. 그리하여 왜국에 끌려간 겁쟁이라는 오명을, 죽지 않고 살아 돌아왔다는 조롱을 이깁시다. 그러면 우리는 먼 훗날 험한 가시밭길을 당당히 헤쳐 온 사람들로 기억될 것이오. 그것이 우리를 낳아준 어버이에게, 우리 아들딸에게…… 흐흑.”몽린은 끝내 오열했다. 몽인과 산척패들이 울먹이며 그를 감쌌다. 스무 해 전 안골포를 떠날 때 내리던 눈물비가 모두의 얼굴에서 내리고 있었다. 그들은 더욱 검질기게 손을 맞잡고 소리쳤다.
“고수레…… 고수레…….”
“고시레…… 고시레…….”   (끝)

(※이번 회를 끝으로 【소쇄원의 피로인】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글을 연재해 주신 양진영 작가님께 거듭 감사드리며, 아울러 ‘소쇄원의 피로인’을 끝까지 애독해주신 독자여러분께도 감사드립니다./ 담양뉴스)

장광호 편집국장  dn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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