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빚

한해의 결실을 헤아려보는 동지 무렵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올 한해 결실은 어땠습니까? 오늘은 먼저 신덕룡 시인의 「동지」라는 시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신덕룡 1956년 경기도 용문에서 태어나 그동안 평론을 해왔는데, 얼마 전엔 「소리의 감옥」이란 시집을 내기도 한 시인입니다.

폭설이다. 하루종일
눈이 내려 집으로 가는 길이 지워졌다.
눈을 감아도 환한 저 길 끝
아랫목에서 굽은 허리를 지지실 어머니
뒤척일 때마다 풀풀, 시름이 날릴 테지만
어둑해질 무렵이면 그림자처럼 일어나
홀로 팥죽을 끓이실 게다.
숭얼숭얼 죽 끓는 소리
긴 겨울밤들을 건너가는 주문이리라.
너무 낮고 아득해서
내 얇은 귀에는 들리지 않는다.
눈 그늘처럼 흐릿해서 들여다볼 수 없다.
                                                     -신덕룡, 「동지」

폭설이 내리면 모든 길이 지워지겠지요. 윗길 아랫길 샛길 어디든 다 지워지겠지요. 폭설이 내리면 집으로 가는 길도 지워지겠지요. 하지만 눈을 감아도 환한 길이 있지요. 폭설로 지우고, 지진으로 지우고, 폭풍으로 지워도 환하게 열리는 길이 있지요. 그 길은 이미 마음으로, 영혼으로 난 길이니까요.

그 마음속으로 난 환한 길 끝엔 아랫목에서 굽은 허리를 지지실 어머니가 계십니다. 삭신이 아파서 이리저리 뒤척일 때마다 시름과 탄식이 풀풀 날릴 테지만 동짓날 저녁이면 그림자처럼 벌떡 일어나 홀로 팥죽을 끓이실 어머니가 계십니다. 그러니 아무리 폭설이 내려 길이 막힌들 어디 집으로 가는 길이 지워질까요?  

그런 어머니가 숭얼숭얼거리며 죽 끓이는 소리가 우리에겐 긴 겨울밤들을 건너가는 주문, 아니 기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취직을 못해도, 실직을 해도, 몸이 아파도, 마음이 괴로워도 그 어머니의 주문이 있어 우리는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기도로 막힌 길은 다시 환해지고 말겠지요. 지금은 너무 낮고 아득해서 잘 들리지 않지만, 그러나 결코 지울 수 없는 마음의 길이 오늘 눈앞에 문득 환해 옵니다.

해마다 성탄절은 돌아옵니다. 하늘엔 영광, 땅에는 평화가 넘쳐나길 기도해봅니다. 이번엔 김종삼 시인의 「북치는 소년」이라는 시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김종삼 시인은 1926년 황해도 은율 출생으로, 1954년 <현대예술>로 작품 활동을 시작해서 『북치는 소년』 등 여러 시집을 냈습니다.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

가난한 아희에게 온 
서양나라에서 온
아름다운 크리스마스카드처럼

어린양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진눈깨비처럼
                                              -김종삼, 「북치는 소년」 

성탄절이면 꼭 생각나는 시가 이 「북치는 소년」입니다. 첫 행부터 시가 당혹스럽지요?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 북을 치는 소년이라는 표현이 말입니다. 과연 ‘내용 없는 아름다움’라는 말이 무엇을 뜻할까요? 말 그대로입니다. 우리는 늘 삶이나 존재에 있어 무언가 내용이나 주제가 무겁고 커야만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 걸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탄절만큼은 이런 무거움이니 깊이니 하는 것 다 떨쳐버리고 그저 흥에 겨워서 신명나게 북을 쳐대는 아이처럼 아름다워지자는 뜻이지요. 
  
들판의 꽃 한 송이에 기뻐할 줄 알고, 어떤 소녀의 착한 눈망울 하나를 보는 것만으로도 삶에 감사를 느끼는, 그런 소박한 평화를 누릴 줄 아는 삶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가난한 아이에게 서양나라에서 온 아름다운 크리스마스카드처럼, 어쩌면 그런 소박하면서도 소중한 것이 삶에 늘 넘쳐나면 좋지 않겠습니까?
  
겨울에도 먹이를 찾으러 산등성이를 헤매고 다니는 고단한 어린양이지만, 그 등성이에 가볍게 내려 반짝이는 진눈깨비처럼, 삶은 그래도 아름답고 설레게 하는 그 무엇입니다. 폴 발레리는, 삶은 외양간의 지푸라기처럼이라도 빛난다고 했는데, 아무리 무겁고 고통스런 짐을 짊어진 삶 속에도 희망은 있고, 그 희망은 가볍게 날리는 눈처럼도 빛나는 것입니다. 
   
정양이란 시인에게 「첫눈」이란 시가 있습니다. “한번 빚진 도깨비는/갚아도 갚아도/갚은 것을/금방 잊어버리고/한평생 그걸 갚는다고 한다/먹어도 먹어도 허천나던/흉년의 허기도 그 비슷했던가//보고 싶어도 보고 싶어도/소용없는 사람아/내려도 내려도 다 녹아버리는/저 첫눈 보아라//몇 평생 갚아도 모자랄/폭폭한 빚더미처럼/먼 산마루에만/희끗거리며 눈이 쌓인다”라는 시입니다.
  
빚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써서 패가망신하는 고리채 등이 있지만, 반대로 좋은 빚도 있습니다. 저는 1984년 문단에 등단한 뒤 올해로 40년 가까이 문단생활을 하는데, 결코 잊히지 않는 문단의 선생님이 한 분 계십니다. 그 분은 당시 아무 것도 아닌 저의 고독과 외로움으로 점철된 편지를 늘 받아주어서 저를 계속 시 쓰게 한 분입니다. 저는 그 고마움에 대한 어떠한 답례도 못해드려 늘 마음의 빚이 되어 있지만, 저는 그 빚만 생각하면 늘 마음이 설렙니다.
  
한번 빚진 도깨비가 갚아도 갚아도 갚은 것을 금방 잊어버리고 한평생 그걸 갚는 것처럼 나도 평생 갚아도 못 갚을 사랑의 빚이 그 선생님에 대한 빚입니다. 하지만 갚아도 갚아도 그 빚 다 못 갚았는데, 첫눈처럼 상대가 녹아 사라져버리는 게 삶입니다. 그러니 그런 아름다운 빚이 있다면 더 늦기 전에, 조금이라도 갚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올해 안에 말입니다.*

장광호 편집국장  dn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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