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여자들과 봄이 오는 소리

새해가 시작되어 어느덧 1월도 중순입니다. 며칠 지나면 또 설날이겠지요. 예전 같으면 설날에 우리나라 여자들은 몇 날 며칠을 중노동으로 지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김기택 시인의 「걸레질하는 여자」를 읽어보려고 합니다. 김기택 시인은 1957년 경기도 안양에서 출생하여 198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문단에 나왔습니다. 

시집으로 『태아의 잠』 『사무원』 등이 있고 김수영문학상, 미당문학상 등을 수상하였습니다. 

걸레질을 하려면 무릎을 꿇어야 한다.
허리와 머리를 깊이 숙여야 한다.
엉덩이를 들어야 한다.
무릎걸음으로 공손하게 걸어야 한다.
큰절 올리는 몸으로
아기 몸의 때를 벗기는 마음으로 닦지 않으면
방과 마루는 좀처럼 맑아지지 않는다.
어디든 떠돌아다니고 기웃거리고
틈만 보이면 비집고 들어가 눌러앉는 먼지들:
오라는 곳 없어도 밤낮없이 찾아오고
누구와도 섞여 한 몸이 되는 먼지들:
하지만 정성이 지극하면 먼지들도 그만 승복하고
고분고분 걸레에 달라붙는다.
걸레 빤 물에 섞여 다시 어디론가 떠난다.
그렇게 그녀는 방과 마루에게 먼지에게
매일 오체투지(五體投地)하듯 걸레질을 한다.
                                              -김기택, 「걸레질하는 여자」

이 시를 두고 한 사람의 아내이자 아이 둘의 어머니인 소설가 조명숙 씨는 이렇게 평합니다. “집안을 닦는 아내의 걸레질은 오체투지다. 아이에게 남편에게 큰절 올리는 마음으로 자기를 낮추고 버린다. 그 자세는 낮추고 버렸으되 낮아지고 버려진 것들을 껴안은 대지의 모습이다. 고분고분 일상의 먼지들이 쓸려가고 집안 가득 활기와 온기를 되찾게 하는 신비로운 힘은 아내의 오체투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가족은 아내의 성자, 성자 앞에서 완벽하게 자신을 낮출 줄 아는 아내의 흔들림 없는 신앙은 아름답다”라고 말이지요.

조명숙씨는 참으로 정숙한, 전통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는 분이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아내들의 이런 고분고분한 순종과 너그러움을 으레 마땅한 것으로 생각하는 남자들이 있다는 것이 오늘날 세상에선 큰 문제가 되어 있습니다. 소위 가부장 지배문화에 물들어 있는 남자들의 못난 이기심은 심지어 아내를 몸종 부리듯 하는 경우가 지금도 주위를 돌아보면 비일비재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호주법이 개정되어서 아내들도 당당하게 자기만의 호적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직장에선 성희롱법이 제정되어서 여성을 직장의 하나의 꽃으로나 여기는 풍조도 많이 시정되었습니다. 사장이나 국회의원들도 여성을 잘못 대했다간 패가망신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러기에 위 시 「걸레질하는 여자」에서처럼 여자들은 정숙과 순종이 삶의 미덕이라고 해선 아니 됩니다. 이 시의 자발적 순종은 사실 종교적인 것입니다. 아이에게 남편에게 큰절 올리는 마음으로 자기를 낮추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지켜야할 가치들, 지켜야 할 아름다움, 지켜야 할 도리에 정성을 다하자는 것입니다. 신앙인이라면 세상에 이런 의로움을 이루시는 신에 대한 경배이겠지요. 또한 그 걸레질은 신 앞에서 자기 마음을 바지런히 닦는 행위이고요.  

바깥 온도가 영하인 이런 삼동에도 산과 들엔 봄이 오는 소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엔 우리 고장 담양 출신인 최두석 시인의 「노루귀」라는 시를 감상해봅니다. 
최두석 시인은 1980년 <심상>으로 등단하여 『대꽃』 『성에꽃』등의 시집을 냈습니다.

봄이 오는 소리 
민감하게 듣는 귀 있어 
쌓인 낙엽 비집고 
쫑긋쫑긋 노루귀 핀다 
한 떨기 조촐한 미소가 
한 떨기 조촐한 희망이다 

지도에 없는 
희미한 산길 더듬는 이 있어 
노루귀에게 길을 묻는다 
                                                      -최두석, 「노루귀」

시인 최두석은 이야기시론의 주창자입니다. 
이야기시론은 "내 격정의 상처는 노래에 쉬이 덧나/다스리는 처방은 이야기일 뿐/이야기로 하필 시를 쓰며/뇌수와 심장이 긴밀히 결합되길 바란다"(「노래와 이야기」)는 시에 나타나 있듯이, 서정과 서사 혹은 주관과 객관 사이의 팽팽한 균형과 긴장 속에서 펼쳐집니다. 그런 시인이 최근에는 위 시에서 보듯 시가 이야기에서 노래로 말의 방식이 바뀌고, 사회현실에서 자연으로 시선의 방향이 바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최두석 시에 변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그의 시는 언제나 현란한 수사나 기교를 모두 버린 담박함과 정직성을 통해 고전적 품격을 지향한다는 것, 또 「대꽃」 「성에꽃」 「사람들 사이에 꽃이 필 때」 「꽃에게 길을 묻는다」 등 그의 여러 시집 제목에서 보듯 '꽃'이라는 기표를 지속적으로 등장시키며 그 꽃의 의미와 향기를 끝없이 묻는다는 것입니다. 

대꽃과 성에꽃은 사실 역사적이고 현실적인 함의를 품고 있는 모진 꽃이지만, 얼레지나 노루귀 등은 자연과 생명의 싱그러운 꽃입니다. 어쨌든 그 꽃들이 사람들 사이에 피기를 바라다가 결국 그런 꽃들에게 삶과 존재의 길을 묻는 시인은 얼마나 맑고 향기로운가요. 

 「노루귀」란 시는, 우선 노루의 귀처럼 생겼다 해서 명명되어진 노루귀란 꽃 이름에서 착안하여 그걸 봄이 오는 소리를 민감하게 듣는 귀로 비유합니다. 그러니 당연히 그것이 쫑긋쫑긋 필 수 밖에 없지요. 나아가 그 꽃이 한 떨기 조촐한 미소처럼 보인다면 희망마저도 한 떨기 조촐한 꽃으로 피어날 것 아닌가요. 

한데 그런 노루귀가 핀 산길, 사람의 지도엔 없는 희미한 산길을 더듬는 이가 있습니다. 그가 산삼을 찾으려는 심마니이거나, 산사에 오르는 스님이거나, 아니면 자연과 존재의 길을 묻는 자이거나 간에 그들은 모두 노루귀에게 길을 묻습니다. 왜 그런가요? 두 말 할 필요도 없이 그렇게 봄이 오는 소리를 듣고, 그렇게 조촐한 미소로 맑고 향기로운 희망을 열어 보이는, 그 노루귀에게 길을 묻지 않고 누구에게 묻겠습니까.* 

장광호 편집국장  dn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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