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번째 꿈, 내사랑 자미화> 31화

미명의 어둠을 밟고 창암촌을 출발한 가마는 날이 희번하게 밝아올 무렵 석저촌 앞을 지났다. 가마가 석저촌 앞에 이르자 양산보의 장모와 처제들이 마을 앞에 미리 나와 있다가 잠시 얼굴을 보았다. 양산보의 세 처제들은 병이 든 후로 피골이 상접해진 언니를 처음보고 눈물바람을 했다.

가마는 서둘러 배재를 넘었다. 배제에서 잣고개까지는 소나무와 잡목이 하늘을 가린, 조붓한 산길이라 가마가 지나가기에는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게다가 아직 2월의 이른 아침이라 바람이 매서웠다. 가파른 잣고개 돌밭 길을 올라, 고갯마루에 서자 광주가 한눈에 들어왔다. 아침에는 하늘이 찜부럭하더니 정오쯤에야 햇살이 비쳤다. 가마꾼들은 잣고개 마루에서 잠시 쉬면서 주먹밥으로 요기를 했다. 가마꾼들이 쉬는 동안 양산보는 가마 문을 열고 아내의 상태를 살폈다. 아내는 여러 겹으로 개켜놓은 이불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다가 남편의 얼굴을 보자 억지웃음을 지어보이더니, 소피를 보겠다면서 문을 닫으라고 했다. 김 씨 부인은 잠시 후에 버들이를 찾았다. 버들이가 가마 문을 열고 놋요강을 내왔다. 양산보가 요강 안을 얼핏 살펴보니 핏빛이 가득했다. 양산보가 가마 문을 열고 아내한테 괜찮으냐고 물었고 아내는 대답 대신 가볍게 고개만 끄덕였다.

가마가 광주를 벗어나 무등산을 뒤로하고, 그의 선대가 살았다는 양과동을 오른쪽으로 비껴지나 남평에 이르렀을 때는 정수리 위의 해가 서쪽으로 두어 뼘이나 벗어나 있었다. 일행은 남평에서 잠시 불을 피워 언 발을 녹이고 늦은 점심을 먹었다. 양산보는 언뜻 정암 스승의 유배길을 함께 배종했던 이귀가 생각났다. 장례 후로 헤어져 소식이 끊겼는데 그동안 어찌 지내는지 궁금했다. 어쩌면 그도 고향에 은거하고 있을 것만 같았다. 의원을 찾아가는 길이 아니라면 그를 만나 그간의 이야기로 회포를 풀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서둘러야 해 떨어지기 전에 나주 송월촌에 당도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냥 지나치기로 했다.
 
새벽에 창암촌을 출발한 가마는 밤이 깊어서야 나주 송월촌 유 의원 집에 도착했다. 유 의원 집에는 양산보 처가에서 보낸 집사의 부탁을 받고 나주에 사는 8촌 처당숙뻘 되는 김  참봉이라는 분이 미리 와 있다가 일행을 맞았다. 양산보는 병든 딸을 위해 마음을 써준 장인에 대해 찐덥진 고마움을 마음 깊이 새겼다. 의원 집에는 방이 여러 개 있었고 방마다 병자들과 가족들이 벅신거렸다. 가마꾼들은 집사를 따라 참봉 댁으로 가고 양산보의 처당숙은 남았다. 
“학포 공한테서 기별을 받았습니다. 정암 대감 유배 시에 배종하셨다는 귀한 제자 분을 여기서 뵙게 되니 참으로 광영입니다. ”
 
어렸을 때 양학포와 같은 마을에서 자랐다는 유 의원은 두 다리가 없어 조금 높아 보이는 나무 의자에 앉은 채 허리를 굽혀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양산보는 자신보다 연치가 배나 더 많아 보이는 어른으로부터 정중하게 예의범절을 갖춘 인사를 받자 면괴스러웠다. 유 의원은 먼저 병자부터 봐야겠다면서 절진실로 안내했다. 양산보가 아내를 안고 방으로 들어가 뉘었다. 아내는 먼 길을 오는 동안 가마 속에서 시달려 마른 나뭇잎처럼 기력이 쇠진해 보였다. 시종 눈을 감은 채 거푸 가느다란 신음소리만 냈다. 잠시 후 유 의원이 엄장한 청년에 안겨 들어오더니 병자 시중을 들어줄 버들이만 남게 하고 나머지는 약방에 가 있으라고 했다. 양산보는 초조한 마음으로 유 의원이 환자를 보고 나오기를 기다렸다. 한참을 기다려도 유 의원은 나타나지 않았다. 옆에 있던 8촌 처당숙 김 참봉이 집에 가서 요기를 하고 다시 오자고 했으나 거절을 했다. 나주까지 오는 동안 아내는 여러 차례 가마를 멈추게 하고 요강에 소피를 하였는데 그 때마다 오줌이 핏빛이었던 것이 걱정되었다.
 
한참 후에야 유 의원이 엄장한 청년에 안겨 양산보가 기다리고 있는 방으로 들어왔다.
“참, 인사 올려라. 조정암 대감 제자이시고 기묘년에 정암 대감을 배종한 양산보 선비님이시다.”
유 의원이 몸피가 크고 우럭우럭하게 생긴 청년에게 이르자 청년은 방바닥에 넙죽 엎드려 절했다.
“제 자식 놈입니다. 애비 수족노릇을 해주고 있답니다.”
유 의원의 말을 듣고서야 양산보는 고개를 거듭 끄덕이며 유 의원의 얼굴을 살폈다. 호롱불빛에 비췬 유 의원의 표정이 무겁고 어두운 것을 보고 양산보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듯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너무 늦었네요.”
유 의원이 마치 자신의 잘못이나 되는 것처럼 침통한 얼굴로 말했다.
“혈붕은 혈붕인데, 붕루라기 보다는 징가가 분명한 듯싶소이다. 단순한 산후 하혈이 아닙니다요. 붕루는 배꼽 위에서 혈루가 생긴 것이고 징가는 배꼽 아래서 생긴 것이지요. 혈붕은 원래 열독의 사기나 한랭한 사기 등 나쁜 기운이 쌓여 경락에 손상을 끼쳐 생긴 것인데, 부인께서는 종괴가 분명한 듯싶소이다. 그것도 악성 종괴입니다. 자궁강은 말 할 것도 없고 이미 골반 내 장기며 방광, 직장까지 퍼지고 폐나 간을 비롯하여 복강 내 장기도 종괴가 퍼져 성치 않은 듯합니다. 적어도 일 년 전에 발병한 듯합니다. 너무 지체되어 실기를 한 것 같습니다.”
유 의원은 침통한 얼굴로 양산보를 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크게 낙담한 양산보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뱃속이 딱딱한 덩어리가 생긴다는 적취 말인가요?”
“독기와 사기가 침입하여 어혈이 생긴 지 오래된 것 같습니다. 그런 몸으로 어찌 아기를 낳으셨는지 놀랍습니다.”
“살릴 방법이 없다는 말인가요?"
"몹시 안타까운 일입니다.“
“의원님, 살려주십시오. 살려야 합니다.”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약으로는 도저히...”
“그래도...이대로 죽는 것을 보고만 있으라는 말입니까요? 처방을 해주십시오. 약으로 안 되면 침은 어떤가요.”
“적취에는 대게 가미사물탕이나 계지복령환을 쓰기도 합니다만, 이제 효험이 없을 것입니다.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아편으로 통증을 완화시키는 방법 밖에는....”
“얼마나 남았는지요.”
“글쎄요. 잘 해야 두세 달이나.... 오늘은 우리 집에서 유하시고...아무래도 댁으로 모시고 가시는 것이....”
유 의원은 망설이듯 띄엄띄엄 말을 이었다. 양산보는 한동안 할 말을 잊은 채 잠자코 있었다. 절박감으로 온몸에 맥이 풀리면서 가슴이 답답해졌다. 좀 더 일찍 손을 쓰지 못한 것이 후회되었다. 맥이 풀리면서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래도 약을 좀 지어주시고 오늘밤 편히 잘 수 있게 아편도 좀...”
양산보는 너무 목이 메어 거듭 마른침을 삼켜가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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