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한때를 뒤뚱뒤뚱 걷는 아이

선(禪)에서 대경관심(對境觀心)이라는 말이 있다. 
밖의 사물을 대할 때 그 사물과 연계되는 자신의 마음을 통찰하는 것으로써, 감성적 초월을 통해 순간을 영원으로 인식하는 통로를 가리킨다.

초록이 짙어가는 오월, 담장의 덩굴장미가 아침 이슬에 반짝이는 선홍빛과 함께 향기의 진동으로 마당 일대를 온통 물들이는 것을 보았을 때, 우리는 그 꽃의 싱그럽고 아름다운 자태에 홀딱 반한다.

그 순간 일개 장미라는 사물이 장엄하고 숭고한 것의 본체처럼 여겨져 우리의 감성과 인식이 점차 꽃 피고 지는 일의 우주적인 일로까지 확대됨을 경험할 때가 종종 있다. 

그리고 이런 경험들은 분석적 사유방식이나 논리적 언어표현으로는 그 심미적 진실을 잡아낼 수가 없다. 선에서 언어의 문자적 의미에 매달리지 말라고 하는 것처럼, 시 역시 마찬가지여서 비록 언어의 은유적 기능을 차용하여 복잡 미묘한 감각과 의의, 신비한 체험을 하기도 하지만 여전히 언어문자에 대한 축자적 해석이나 천착은 비평가에나 맡길 일인 것이다.  

비 갠 하늘에서 땡볕이 내려온다. 촘촘한 나뭇잎이 화들짝 잠을 깬다. 공터가 물끄러미 길을 엿보는데, 두 살배기 아기가 뒤뚱뒤뚱 걸어간다.

생생한 생(生)! 우주가 저렇게 뭉클하다
고통만이 내 선생이 아니란 걸
깨닫는다. 몸 한쪽이 조금 기우뚱한다
바람이 간혹 숲 속에서 달려 나온다.
놀란 새들이 공처럼 튀어 오르고, 가파른 언덕이 헐떡거린다.

웬 기(氣)가― 저렇게 기막히다

발밑에 밟히는 시름꽃들, 삶이란
원래 기막힌 것이라고 중얼거린다

나는 다시
숨을 쉬며 부푼다. 살아 붐빈다.
                                    -천양희, 「여름 한때」

여름 한때, 비 그치고 땡볕이 내리쬔다. 비에 촘촘하게 늘어져 있던 나뭇잎들이 뜨거운 땡볕 때문에 화들짝 정신을 차린다. 공터에 앉아 물끄러미 길을 엿보듯 바라보는데 저만큼에서 두 살배기 아이가 뒤뚱뒤뚱 걸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순간 시인은 나뭇잎들만큼이나 화들짝 놀라며 정색을 하고 투사적 직관을 해낸다.

“생생한 생(生)! 우주가 저렇게 뭉클하다”라고. 이어지는 문장에서 “고통만이 내 선생이 아니란 걸/깨닫는다.”라고 하는 걸 보면 시인은 그간 삶의 고통으로 무척 시달렸던 모양이다. 다른 시에서 그간 ‘물속에서 물 먹는 삶’을 살았다는 표현이 있듯이 익사나 다름없는 삶을 살았으니 그 고통이 얼마나 컸겠는가. 오죽하면 그 고통을 선생으로 삼았겠는가. 

한데 그때 비 갠 날 공터에 접한 길에서 두 살배기 아이가 뒤뚱뒤뚱 걸어가는 모습을 본 것이다. 그걸 보니 얼마나 환희에 찼겠는가. 보통 사람의 마음으로도 아기가 뒤뚱뒤뚱 걸어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마음 설레고 싱그럽고 가슴 뻐근한 일임을 우리는 잘 안다.

하물며 지독한 고통에서 살았을 시인의 마음으로 보는 아이의 걸음은 어쨌겠는가. 오죽하면 그 아이의 생생한 생 하나가 우주가 되어서까지 시인의 가슴을 울렸을까. 아주 작은 아이 하나가 거대한 우주가 되는 일은 고통에서 탈출한 시인의 직관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어쨌거나 시인의 가슴 뭉클한 우주적 환희는 주위를 온통 생명의 기, 삶의 기운, 신생의 의지로 가득 차오르게 한다. 바람이 문득문득 숲 속에서 달려 나오고, 그 바람에 놀란 새들이 공처럼 튀어 오르고, 심지어 뒤편으로 보이는 가파른 언덕조차 생의 크나큰 숨으로 헐떡거린다.

새삼 세상에 충만한 기(氣)가 저렇게 기막히다. 발밑에 밟히는 시름꽃들조차 삶이란 원래 기막힌 것이라고 중얼거린다. 물론 여기서 시름꽃의 기막힘은 그렇게 평생을 발밑에서 밟혀 사니 기막힐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그런 삶을 기어이 살아내는 게 또한 기막힌 것이라는 이중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물론, 시름으로 짓밟혀온 시인의 그간의 삶이 아이 하나 때문에 신생의 의지로 차오르는 기막힘을 이미 겪었지 않는가. 그러니 “나는 다시/숨을 쉬며 부푼다. 살아 붐빈다.”고 외친다. 마치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고 외친 어느 서양시인처럼. 다시 말하지만 뒤뚱뒤뚱 걷는 아이를 보고 “생생한 생(生)! 우주가 저렇게 뭉클하다”고 외친 직관과 통찰력이 있었기에 이 시는 평담하지만 큰 울림을 준 시가 될 수 있었다. 
    
  애끊는 정 말로는 할 길 없어             相思都在不言裡    
  밤 새워 머리카락 반 남아 세었구나       一夜心懷鬢半絲     
  소첩의 그리워하는 정 아시려거든         欲知是妾相思苦    
  손가락에 헐거워진 금가락지 보시구려     須試金環減舊圓   
                                               - 매창, 「규원(閨怨)」

이 시는 매창의 시 「규원(閨怨)」이다. 
매창(李梅窓, 본명 이향금, 1573-1610년)은 조선조 선조 때의 부안 기생이었다. 시와 문장에 능했고, 노래와 거문고 연주에 탁월한 솜씨를 보인 조선조 명기 중의 명기였다고 한다. 그녀는 타고난 시재로 주옥같은 시문들을 많이 남겼는데 위의 시도 그 중의 하나이다.

천민출신 시인 유희경을 무척 사랑하였으나 그가 전쟁에 나간 뒤 돌아오지 않자 무척 그리워하며 쓴 시라고 알려져 있는데, 여기서는 마지막 행이 직관과 통찰력을 빼어나게 발휘한 시안이다. 

소첩이 그대를 생각하고 그리워하는 정 알고프거든, 그리움의 고통으로 손가락이 말라버려서 금가락지가 헐거워진 것을 보라고 한다, 아마도 그 금가락지는 사랑하는 그대가 끼워주고 간 것이리라. 확실한 구체적 형상을 통해 시적 진실의 핵심을 드러낸 솜씨가 만만치 않다. 
그리워하느라 손가락이 말라버려 헐거워진 금가락지라니!

한편의 시에 미치는 직관과 통찰력의 힘은 시의 전부라고 할 수 있다. 시의 본질로 날카롭게 진입하는 직관적 투사와 그를 통해 시의 핵심적 진실을 획득해내는 통찰력은 시인의 타고난 재능이기도 하거니와, 시에 대한 치열한 감각과 인식의 쇄신을 통해 힘들게 얻어지는, 그야말로 시의 형형한 눈이라고 할 수 있다.*

장광호 편집국장  dn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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