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번째 꿈, 내사랑 자미화> 제33화

양산보는 버들이를 불러 부인이 편하게 앉을 수 있도록 돗자리와 이불을 가져다 자미화를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곳에 깔도록 했다. 그러고 나서 양산보는 조심스럽게 부인을 안고 밖으로 나갔다. 마당에서 놀고 있던 세 아이들이 쪼르르 따라오자 양산보가 손사래를 치며 쫓았다. 그는 부인과 둘이서만 자미화를 보고 싶었다. 햇볕이 따가웠으나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 더위를 식혀주었다. 양산보는 자미화가 마주 보이는, 은행나무 그늘 밑에 깔아놓은 돗자리 위에 부인을 앉히고 이불로 등을 받쳐주었다.
“참 곱네요. 저 꽃이 부러워요.”
김 씨 부인이 힘겹게 고개를 들고 햇살과 어우러져 더욱 붉게 반짝이는 자미화를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에 옮겨다 심기를 잘한 것 같소.”
“저 꽃은 내년에도 피겠지요? ”
“부인도 내년에 피는 저 꽃을 다시 볼 수 있을 게요.”
“서방님한테 시집 온 지 팔 년째가 되네요. 팔 년이 바람처럼 후딱 지나갔어요. 팔 년이 여드레 같이 짧은 것 같애요.”
“그 사이 아이를 넷이나 낳었지 않소.”
“부탁이 있어요.”
“말해보시오. 무슨 부탁인들 못 들어주겠소.”
“저 죽거들랑....무덤 앞에 자미화 한 그루 심어주셔요. 그러고...일 년에 한번... 꽃이 필 때 면 꽃을 보러 와주셔요.”
“그런 말 하지 마시오. 죽기는 왜 죽는다고 그래요.”
“냉큼 약속이나 해주셔요. 어서요.”
“그러리다.”
대답을 한 양산보는 부인의 손을 잡았다. 매마른 손이 차가웠다. 김 씨 부인은 말없이 자미화만 바라보았다.
“꽃을 보았으니 그만 들어갑시다.”     
“아니어요. 서방님 옆에서 저 꽃을 보고 있으니 아무데도 가고 싶지가 않어요. 그냥 이대로 있어주셔요.”                    
김 씨 부인이 그렇게 말 하고 나서 살며시 눈을 감더니 두 눈에서 눈물이 주루루 흘렀다. 양산보는 행여 부인의 마음을 다치게 할까 저어되어 닦아주지 않았다. 다만 안쓰러운 마음으로 눈물에 젖은 부인의 얼굴을 하염없이 들여다볼 뿐이었다.
“서방님 만나서... 지난 팔 년 동안.... 즐거웠....”
부인은 말끝을 흐리더니 갑자기 허리를 꺾으며 기침을 토해냈다. 양산보는 서둘러 부인을 안고 안채로 향했다. 부인은 기침을 멈추지 못했다.
 
김 씨 부인은 나주 유 의원 댁에서 돌아온 지 넉 달 후인 그 해 여름, 소쩍새가 유난히 구슬피 울던 밤에 스물세 살 꽃다운 나이로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아내를 땅에 묻은 날 밤, 양산보는 달빛 속에 처연한 모습으로 피어있는 자미화 나무 밑에 홀로 앉아 오열했다. 그리고 다음날 방문을 걸어 잠근 채 사흘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밖에 나오지 않았다. 숨을 거두기 엿새 전, 자미화가 피었다고 말했더니 보고 싶다고 하여, 함께 나란히 앉아 꽃구경을 하던 아내 모습이 눈에 선했다.
“자미화 필 때면 제 생각도 좀 해주시어요.”
그날 아내는 자미화를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겨우 알아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양산보는 아내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달빛에 흥건하게 젖은 꽃잎을 쓰다듬어주었다. 그날 밤 양산보는 자미화 밑에 쪼그려 앉은 채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며 꼬박 밤을 새웠다.

 
꿈에서 깬 문인주는 마음이 아려와 한동안 눈을 감은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너무 빨리 세상을 떠난 김 씨 부인에 대한 연민도 컸지만, 아내를 잃고 허전함과 서러움을 참지 못해 심신을 가누지 못하는 양산보가 애잔해서 마음이 아팠다. 소쇄처사를 만날 수만 있다면 그에게 국화주를 대접하고 위로하고 싶었다. 그는 갑자기 자미화가 보고 싶었다. 자미화를 보면 아련하게나마 김 씨 부인의 영혼이 느껴질 것만 같았다. 소쇄원 안의 자미화가 세 번 째 꽃을 피우고 서서히 시들어가고 있었다. 어느덧 가을이 왔다.
 
문인주는 날이 저물어 집으로 오는 길에 포도 두 송이를 사 들고 최 선생 댁에 들렀다. 최 선생은 형광등을 환하게 밝히고 책상에 엎드리고 앉아서 뭔가를 쓰고 있다가, 문인주를 보자 화들짝 반겨주었다. 하루 잔까지만 해도 죽을병에 걸린 사람처럼 기분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던 최 선생이 하룻밤 사이에 활기를 찾은 것을 보자 다소 의아스러웠다.
“왜 늦었어? 요즘 자네 날마다 밤이 되어서야 집에 오는데 무슨 일이 있어? ”
최 선생이 사인펜으로 뭔가를 쓰고 있다가 문인주를 반기며 물었다. 문인주는 그에게 꿈 이야기를 해주려다가 참았다. 꿈에서 양산보를 만난 이야기를 혼자만 간직하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그의 꿈 이야기를 믿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기도 했다. 
“선생님, 기분 좀 나아졌어요? 지금 뭘 하세요?”
“전단지 원고를 쓰고 있네.”
“전단지라뇨? 진주를 찾는 전단지 말입니까?”
“그래. 한번 봐줘.”
최 선생은 A4 용지에 사인펜으로 또박또박 쓴 전단지 원고를 보여주었다.

진주를 찾습니다
진주는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제 인생의 마지막 반려자입니다.
오랫동안 한식구로 살아온 진주는
올해 열두 살로 검정색 입니다
찾아주시는 분께는 후사하겠습니다.    
연락처 010-0007-2005 최 00                
     
“ 진주 사진은 있지요?”
“사진? 없는데? 언제 사진을 찍었어야지.”
“그럼 안 되죠. 사진이 없으면, 진주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를 찾고 있는 것 같지 않아요? ‘진주를 찾습니다’를 ‘개를 찾습니다’로 고쳐야겠네요.”
“그건 안 되네. 나는 그냥 개를 찾고 있는 게 아니라니깐.”
최 선생은 화를 내며 A4 용지를 거칠게 낚아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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