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어린 경이(驚異)들  

어릴 적 숨바꼭질을 하던 중 컴컴한 마루 밑으로 숨어들었다가 거기 한 구석지에 여남은 개가 넘는 달걀이 고스란히 모아져 있는 걸 발견한 적이 몇 번 있다. 미물짐승에 불과한 암탉이 그렇게 한 자리에 몰래 낳아 감추어 둔 소복한 알들은 그저 눈이 휘둥그래지고 입이 딱 벌어지게 할뿐이었다. 
  
살아갈수록 삶이란 게 바람 빠진 고무풍선 같이 여겨지는 때가 많다. 그럴 때마다 온 마음이 환하게 열리던 그런 경이로운 순간들을 기억하거나 또 기대하게 된다.

어느 시인은 화창한 날 폭포에 빠져 죽으러 갔다가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져 “취할 순간조차 마음에 주지 않고/나타와 안정을 뒤집어 놓은 듯이”(김수영) 떨어지는 폭포를 보고 “와! 귀에 익은 명창의 판소리 완창이로구나”(천양희)라고 외치며, 강렬한 삶의 의지를 세우고 돌아왔다고 한다. 폭포의 장쾌한 소리가 천지를 뒤흔드는 경이로움 속에서 감히 죽음이라는 단어를 생각조차 할 겨를이 없었을 성싶다.  

사실 그런 경이로움 들은 우리가 눈만 새롭게 뜨면 언제 어디서고 찾을 수 있다. 아침 연못에 백련이 순결하게 피어오르는 순간이거나, 오뉴월 강변의 백양나무 초록 잎새가 바람과 햇살에 한도 끝도 없이 반짝이는 순간은 어떻던가. 초등학교 적 달밤에 장독 뒤에서 등물을 하던 이웃집 누나의 하얀 엉덩이를 담 너머로 훔쳐보던 기억이며, 아흔일곱 살까지 살도록 손주가 밖에 나갔다 들어오면 항상 “밥 묵었냐?”고 물으시던 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또 어떻던가.

그중 내 정서의 원형질을 구성하고 있는 경이로움이 하나 있다. 아직도 결코 잊히지 않는 그 경이는 담 너머 대숲에 초저녁 별들이 소금처럼 부서지기 시작하는 때, 들에서 늦게 돌아온 어머니가 그 대숲 밑 샘가에서 쌀 씻던 소리다. 당시에 시골사람들이 대개 그렇듯이 우리 집도 식구가 많아서 아이들조차 굶기를 밥 먹듯 했다. 그래서 하루 종일 뭐 별로 먹은 게 없어서 배는 고프지, 땅거미는 새까맣게 밀려오지, 그런데도 기름 닳는다고 저녁 이슥토록 등을 못 켜게 하는 바람에 마루는 깜깜해지는데도 늘 들일에 찌들린 부모님은 돌아올 줄 몰랐다. 그러다보니 무섬증을 떨치려고 어린 누이들이 “해는 져서 어두운데, 찾아오는 사람 없고”로 시작되는 그 구슬픈 동요를 몇 번이고 불러대며 애를 태우고 태우던 그때야 어머니는 돌아왔다. 

그리고는 부리나케 대숲 밑 샘가로 달려가 보리쌀이건 좁쌀이건 바가지에 담아 씻는 소리는, 그야말로 어둡던 세상이 환하게 열리는 소리였다. 그 소리는 대숲에 별빛 부서지는 소리와 하나로 겹쳐져 천상의 음향같이 여겨졌고, 이윽고 가마솥 아궁이에 마른 솔가지 불이 환하게 타오르는 소리로까지 이어지는, 항상 겪어도 늘 새롭고 경이로운 소리였다.

나는 아직도 인간의 궁극적 비극주의를 넘어서지 못했지만, 일상 속에서 건지는 이런 소중하고 고귀한 경이로움들, 그리고 그런 경이를 노래한 시들 때문에 그런대로 세상은 살 만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다음은 우리나라 시단에서 독보적인 단시로 생의 경이로운 순간을 결정적으로 포착해내는 이시영 시인의 시다.

  마른논에 우쭐우쭐 아직 찬 못물 들어가는 소리
  앗 뜨거라! 시린 논이 진저리치며 제 은빛 등 타닥타닥 뒤집는 소리
                                                -「봄논」

단 2행에 불과한 시지만 겨우내 메마른 논에 봄을 맞아 못자리를 하려고 못물을 대자 시린 논이 진저리치며 좋아하는 모습을 신명나게 표현하고 있다. 특히 못물이 목마르게 기다리는 님을 만나러 신나게 가는 사람처럼 ‘우쭐우쭐’ 시린 논으로 들어간다는 표현과, 그 들어오는 물을 맞는 시린 논이 님을 만나 진저리치게 좋아하는 사람처럼 은빛 등을 ‘타닥타닥’ 뒤집는다고 한 표현은 그  생동감과 함께 절묘함으로 온 들을 공명시키고도 남음이 있다. 정녕 에로틱하고 경이로운 시다. 예전부터 부모들에겐 마른논에 물 들어가는 소리와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소리가 세상에서 제일 듣기 좋은 소리라고 했는데, 여기서 이 말은 사족이다. 다음의 시도 이시영 시인의 장기가 빼어나게 드러난 시다.

  비 맞은 닭이 구시렁구시렁 되똥되똥 걸어와 후다닥 헛간 볏짚 위에 오른다
  그리고 아주 잠깐 사이 눈부신 새하얀 뜨거운 알을 낳는다
  비 맞은 닭이 구시렁구시렁 미주알께를 오물락거리며 다시 일 나간다
                                               -「당숙모」

겉으로는 흔히 시골에서 암탉이 알을 낳는 전후 잠깐 사이를 섬세하게 포착한 시다. 대개 암탉이 ‘되똥되똥’ 걷는 모습도 모습이거니와 알을 낳기 전엔 알 낳을 자리를 보느라 그리고 알을 낳은 후엔 낳은 알을 걱정해서인지 ‘골골골골’ 앓는 소리를 낸다는 것을 시골생활 경험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은 다 안다. 그런데 시인은 여기서 암탉이 앓는 소리를 다만 ‘구시렁구시렁’으로 바꿈으로, 주관적 감각에 의한 독창적 표현에 큰 성공을 거두고 있다.
  
다시 말해 시 속의 암탉이 구시렁구시렁, 일터에서 무언가 못마땅하여 혼잣말을 자꾸 되풀이하며 되똥되똥 돌아와서, 아주 잠깐 사이에 안방 아랫목에 ‘행감치고’ 앉아 있는 서방님에게 눈부신 새하얀 뜨거운 밥을 챙겨주고, 다시 구시렁구시렁 미주알께를 오물락거리며 일 나가는 ‘당숙모’로 환치되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이 ‘구시렁구시렁’이라는 표현이 얼마나 절묘하며 독창적이며 경이로운지 모른다.

그렇게 농촌여성들은 구죽죽 비를 맞으면서도 이리 되똥 저리 되똥거리며, 오명 구시렁 가명 구시렁거리며, 미주알께를 오물락 고주알께를 오물락거리면서 일하고 또 일을 해서 눈부신 새하얀 뜨거운 알을 낳는다. 그래서 예전부터 암탉이 울면 알을 낳는다고 했는데 이 말 또한 사족이다.  

어쨌든 시인의 관찰적 묘사가 무척이나 경이로운 시다. 갑각류 껍질처럼 단단하게 굳어 있는 일상의 더께를 걷어내고 몇 개의 단어만으로 삶의 경이를 창조해내는 시인들의 직관적 통찰력은 모든 예술 중 시가 가장 근원적인 양식으로 존재케 한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존재사유는 시 짓기의 근원적인 방식이다”라고까지 말한다. 삶이 달걀처럼 팍팍할 때 때때로 나타나는 이런 경이로움의 시는 삶의 그 어떤 고통과 고독이라도 넘어서게 할 것 같다.

누군 이상이 무릎 꿇은 게 일상이라 했다. 그러나 이런 일상을 통과하지 않고는 누구도 신에 이를 수 없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래서 일상의 성화, 혹은 일상의 축제를 운위하는 사람도 있다. 우리가 찾는 세계의 비밀과 삶의 경이는 느닷없이 축복처럼 주어지는 게 아니다. 늘 세상을 새롭게 보려고 하는 눈을 벼리면 오늘 맡는 아침공기가 먼 고산의 석남화밭을 스쳐온 듯 향기롭게 느껴지기도 한다는 것을 조용히 믿는 사람들에게 임할 것이다.

장광호 편집국장  dn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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