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Ⅴ(소설) 추월산 길라잡이(48화)

담양뉴스는 『기획연재Ⅴ/소설』로 2020담양 송순문학상 수상작인 강성오 작가의 소설 ‘추월산 길라잡이’를 월2회 연재중입니다. 소설 ‘추월산 길라잡이’는 임진왜란 당시 우리지역 출신 의병장으로 활약했으나 억울하게 처형됐던 김덕령 장군의 아내와 주변 인물들의 비극적인 삶을 형상화한 소설입니다. / 편집자 주.

                              15. 1597년 11월
(48화)
능주는 기가 막혀 말문이 열리지 않았다.
민경이에게 어떤 치욕이 생길지 암담했다. 민경이가 생포된다면 번연히 자결하겠지만, 그건 차후였다. 생포되지 않아야 했다. 죽지도 않아야 했다. 덕령이 시신도 온전치 않았는데, 민경이마저 그런 꼴을 당하게 할 순 없었다. 냉큼 피신시켜야 했다. 위치가 노출되었으니 석굴 안에 있게 할 수는 없었다. 능주는 석굴 안으로 고개를 들이 밀고 위치가 노출되었다고 당장 나와서 다른 곳으로 피하라 했다. 죽으면 코까지 베어간다고 하니 멀리 피해야 한다고 했다. 생포해서 능욕을 보이려고 한다고도 했다. 능주는 두서없이 빠르게 전하고 고개를 빼내 떡배에게 말했다.

  “일단 너도 빨리 피해라. 지리는 잘 알 재?”
  능주는 떡배 등을 떠밀었다. 떡배는 가지 않았다.
  “행님, 이렇게 하입시더.”
  “어떻게?”
  “제가 반대쪽으로 유인을 할랍니더. 행님은 마님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십시오.”
떡배가 제안한 것은 장끼 역할이었다. 장끼는 암컷이나 새끼들의 은신처를 보호하려고 먼저 날아올라 포수나 적들을 유인하는데, 떡배가 그 방법을 제안한 것이었다.
  “그건 내가 할랑께, 너는 빨리 피하라니까!”
능주가 작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볼장 다 봤으니, 어차피 내도 죽일 겁니더. 이 참에 은혜라도 갚고 싶습니더!”
  “은혜라니?”
  “생향을 선뜻 내주셨잖습니꺼? 그런 은공을 모르면 사람도 아니지예.”
  “알았으니까, 일단 피하고 보세.”

석굴에서 능주 일행이 나왔다. 눈발이 굵어져 있었다. 어제의 진눈깨비가 아니었다.
능주는 일행에게 위쪽으로 가라고 손짓했다. 석청이 있는 암벽 위였다. 민경이에게 위치를 알려주었으니 가는 길은 잘 알 것이다. 민경이 일행이 위쪽으로 향하는 곳을 보고 능주는 냉큼 아래로 내달렸다. 떡배도 능주를 따라 날렵하게 따라왔다. 이백 보나 뛰었을까. 족히 백여 명이 넘는 왜군이 조총을 앞에 들고 떼 지어 올라오고 있었다. 능주와 떡배는 옆으로 방향을 틀어 냅다 뛰었다. 바위가 지천이라 제대로 속도를 낼 수 없었다. 자칫 중심을 잃어 발목이 삘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런 걱정은 필요 없었다. 총탄이 이미 몸에 박혔으니까. 탕! 탕! 탕! 탕! 총소리가 추월산의 고요를 헤집었다. 유난히 크게 들렸다.
능주와 떡배는 그 자리에서 고꾸라졌다.

민경이는 또다시 들려오는 총소리에 가슴이 철렁했다.
석청이 있는 암벽 위에 다다른 민경이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철퍼덕 주저앉아 있었다. 한 손에는 꿀단지 보자기를 들고 있었다. 민경이는 이동 중에도 단지가 깨질까 봐 무척 신경 썼다. 잠깐 방심한 통에 능주도 단지를 깨버렸다 하지 않았던가. 단지를 만져보니 다행히 이상은 없었다. 민경이보다 먼저 암벽 위에 도착한 김응회도, 노모도, 걸음을 멈추고 서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올케들은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잘 되었다 싶었다. 분산되면 어느 한쪽은 살아날 가능성이 크니까. 그때 총소리가 들렸다. 능주가 걱정이었다.

  “능주 아저씨!”
민경이가 목 놓아 불렀다.
  “능주 아저씨!”
능주가 대답을 않자 더 크게 불렀다.
  “능주 아저씨!”
민경이가 고함쳤다. 김응회도 노모도 말리지 않았다. 두 분도 능주가 자기들을 위해 희생되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일 터였다. 소나무와 같은 상록수는 별로 없었다. 벌거벗은 나무가 지천이었다. 왜군에게 발각되기 십상이라 더 이상 도망 다닌다는 게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는지도 몰랐다.
  “아저씨! 괜찮으세요?”

고래고래 고함을 쳤지만 능주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심장에 구멍이 숭숭 뚫린 것 같았다. 자기를 위해 고생, 고생, 개고생을 했는데도 부족해, 끝까지 자기를 지켜주려 하다니. 울컥, 가슴에서 뜨거운 감정이 솟구쳤다. 덕룡이가 있다면 이백 근짜리 쌍철추와 오십 근짜리 철병도를 휘둘러 왜군을 단숨에 궤멸시킬 텐데. 어젯밤에도, 지금도, 덕령이는 보이지 않았다. 자기 전에 능주가 그랬다. 장군님이 워낙 출중하셔서, 임금님이 자기를 지켜달라고 장군님을 곁에 두었을 거라고.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이 아니냐고. 장군님이 아니면 누가 임금님을 지켜드리겠냐고. 그런 이유가 아니라면 왜군이 있는데 장군님이 나타나지 않을 리 없다고 했다.

민경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대장부라면 아내보다 당연히 임금님이 먼저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덕령이가 둘도 없는 사내대장부이니, 덕령이는 그 길을 택해야 했다. 그런 연유라면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말이 진짜인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말이 진짜가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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