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재종의 詩이야기/ 詩의 향기,삶의 황홀(42)

느티나무 여자

시는 다른 질서나 체계 안에서 존재하는 대상 곧 사물 등을 자신의 질서로 바라보는 것이다. 시는 타자를 자신의 질서 안에 재편할 뿐만 아니라, 타자의 질서를 통해 자신의 존재가 뿌리내리고 있는 본질적 의미를 역설적으로 깨닫기도 한다.

이러한 타자를 통해 자신을 들여다보는, 혹은 자신의 질서 안으로 타자를 끌어들이는 시적 관계 양상을 유추라고 명명할 수 있다.

비유의 일종인 유추는 원래 쓰고자 하는 관념이나 존재 등을 날것 그대로 쓸 수 없을 경우 거기에 대입될 수 있는 객관적 상관물인 구체적 형상을 빌려와 그 형상의 특성을 치열하게 탐색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섣부른 계몽적 진술이나 카니발적 풍자는 큰소리내지 않고 조용히 속삭이는 시하고는 거리가 멀다.

  평생 동안 쌔빠지게 땅에 머리를 처박고 사느라
  자기 자신을 한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가을날, 잎을 떨어뜨리는 곳까지가
  삶의 면적인 줄 아는
  저 느티나무

  두 팔과 두 다리로 허공을 헤집다가
  자기 자신을 다 써버렸다
  그래도 햇빛이며 바람이며 새들이 놀다 갈 시간은
  아직 충분히 남아 있다고, 괜찮다고,
  애써 성성한 가지와 잎사귀를 흔들어 보이는

  허리가 가슴둘레보다 굵으며
  관광버스 타고 내장산 한 번 다녀오지 않은
  저 다소곳한 늙은 여자

  저 늙은 여자도
  딱 한 번 뒤집혀 보고 싶을 때가 있었나 보다
  땅에 박힌 머리채를 송두리째 들어올린 뒤에,
  최대한 길게 다리를 쭉 뻗고 누운 다음,
  아랫도리를 내주고 싶을 때가 있었나 보다

  그걸 간밤의 태풍 탓이라고 쉽게 말하는 것은
  인생을 절반도 모르는 자의
  서툴고 한심한 표현일 뿐
                                    -안도현, 「느티나무 여자」

안도현은 위 시만 보아도 재치가 뛰어난 시인이다. 태풍이 지나간 뒤 쓰러진 마을의 느티나무의 모습에서 그 느티나무처럼 평생 땅을 일구며 억척스럽게 살아온 농촌여성의 삶을 읽어내는 모습이 아주 흥미롭다. 코믹하면서도 뭉클하고 발랄하면서도 진중한 시인의 발화법은 위트와 해학이 넘치면서도 블랙코미디의 성격을 띠고 있다.

첫 행에 “평생 동안 쌔빠지게 땅에 머리를 처박고 사느라/자기 자신을 한번도 돌아보지 않았다”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 평생을 땅으로 엎드려 땅만 일구며 살아온 늙은 여자도 “딱 한 번 뒤집혀 보고 싶을 때가 있었나 보다”며 “땅에 박힌 머리채를 송두리째 들어 올”려 버렸다는 것이다. 이는 느티나무가 태풍에 뿌리째 뽑혀 쓰러져 누워 있는 모습을 마치 느티나무 스스로, 아니 늙은 여자 스스로가 그렇게 광포하게 욕망을 드러낸 양 블랙코미디를 펼치고 있는 것이다.

그 욕망이라는 것이 땅에서 머리채를 송두리째 뽑아버린 뒤 “최대한 길게 다리를 쭉 뻗고 누운 다음,/아랫도리를 내주고 싶을 때가 있었나 보다”라는 표현에서 짐작할 수 있듯, 어쩌면 일찌감치 청상이 되어 성(性)에서 완전하게 소외된 채 평생 일만으로 살아온, 그야말로 흔히 농촌에서 볼 수 있는 전통적인 여성의 내면에 잠재된 피눈물 나는 욕망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바로 그 지점을 읽어내는 시인의 눈길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한 욕망도 처절하게 죽이고 땅만 일구며 살아온 여인의 삶은 “가을 날, 잎을 떨어뜨리는 곳까지가/삶의 면적인 줄 아는/저 느티나무”와 같다. 부엌에서 논밭으로, 논밭에서 부엌으로만 왔다리 갔다리 한 생애의 면적이 가을날 잎을 떨어뜨리는 곳까지가 삶의 면적인 줄 알고 산 느티나무와 다를 바 무엇인가.

느티나무 잎 떨어지는 면적과 그 늙은 여자의 생애의 면적을 동일시한 시인의 시력이 예리하기 짝이 없으면서도 시를 읽는 사람들에게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복합적인 감정을 유발하는 기막힌 표현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그 느티나무 둥치처럼 “허리가 가슴둘레보다 굵”은 늙은 여자는 사실 “지금껏 “관광버스 타고 내장산 한 번 다녀오지 않은” 그럼에도 다소곳하기만 했던 여자였다.

그런데 이제 태풍에 쓰러져 누운 채 “두 팔과 두 다리로 허공을 헤집다가/자기 자신을 다 써버렸다.” 어쩌면 이 늙은 여자는 느티나무가 태풍을 맞은 것처럼 일로만 살아온 몸에 중풍을 맞고 쓰러져 병상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여자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햇빛이며 바람이며 새들이 놀다 갈 시간은/아직 충분히 남아 있다고, 괜찮다고,/애써 성성한 가지와 잎사귀를 흔들어 보이는” 느티나무처럼, 놀라서 찾아온 자식들과 마을사람들에게 괜찮다 괜찮다 하며 그 마비되어가는 팔다리를 애써 저어대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유추가 가능한 것은, 무엇보다도 “그걸 간밤의 태풍 탓이라고 쉽게 말하는 것은/인생을 절반도 모르는 자의/서툴고 한심한 표현일 뿐”이라고 한 대목에서 시인의 성실함이 물씬 묻어나기 때문이다.

사실 느티나무가 태풍 때문에 쓰러진 것은 맞다. 하지만 그 느티나무에 비유된 삶을 살아온 늙은 여자의 입장에서 보면 중풍으로 쓰러졌건 또 다른 병으로 쓰러졌건 간에 상관없이 지금껏 광포하다시피 잠재한 욕정 한번 못 풀고, 관광 한번 못 가고, 밤낮으로 일만 해서 자식들 죄다 가르쳐 내보내며, 자기 자신을 한번도 돌아보지 못한 삶의 내력 속에 이미 한번쯤은 일어날 큰일을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큰일이라는 게 시골에서 보면 대개 큰 병으로 쓰러지는 일이 다반사니 그것 말고 무엇이겠는가.

시에서 “아랫도리를 내주고 싶을 때가 있었나 보다”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 짓궂은 블랙유머까지도 동원하고 “가을 날, 잎을 떨어뜨리는 곳까지가/삶의 면적인 줄 아는/저 느티나무”라는 표현으로 뭉클하고도 진정스런 비유를 감행한 이 시는 유추적 표현의 교본이 될 만하다. 여기에 안도현의 발랄한 위트와 천연덕스런 해학성은 무겁고 고통스런 민중의 삶을 고통으로만 침잠시키지 않아서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훨씬 부담을 덜게 하는 시적 전략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장광호 편집국장 dn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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