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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Ⅴ(소설)추월산 길라잡이(49화)

담양뉴스는 『기획연재Ⅴ/소설』로 2020담양 송순문학상 수상작인 강성오 작가의 소설 ‘추월산 길라잡이’를 월2회 연재중입니다. 소설 ‘추월산 길라잡이’는 임진왜란 당시 우리지역 출신 의병장으로 활약했으나 억울하게 처형됐던 김덕령 장군의 아내와 주변 인물들의 비극적인 삶을 형상화한 소설입니다. / 편집자 주.                    

                              15. 1597년 11월
(제49화) 
 
  덕룡이가 윤곽이 없는 희미한 얼굴로 나타났다. 두 다리가 없어서 한 걸음도 걷지 못해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었는데, 자네가 못 알아볼까 봐 썩지도 않고 있었는데, 이제나 저제나 하며 눈을 벌겋게 뜨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왜 한 번도 찾아오지 않느냐고 퉁을 놓았다. 민경이는 추월산에서 내려가면 즉시 다녀가겠다고 했다. 꿈이었다. 너무나 생생해서 현실 같았다. 덕령이가 꼭 옆에서 말한 것 같았다. 민경은 덕령이를 만났다는 생각에 가슴이 부풀었다. 다시 잘 수가 없었다. 밤새 뒤척일 수밖에 없었다.
  
 꿈에라도 덕룡이를 다시 보고 싶었다. 새우잠 자세로 뒤척이던 민경이는 무릎과 얼굴이 맞닿을 정도로 더욱 몸을 웅크리고 눈을 감았다. 입구에 피웠던 모닥불의 열기는 식은 지 오래였다. 등잔불과 일행의 열기만으로는 석굴을 따뜻하게 할 수 없었다. 석굴에 냉기가 흘러넘쳤다. 능주 말대로 추위에 대비해 있는 대로 옷을 껴입고서 자리에 누웠지만, 살집이 없는 몸이라 추위가 혹독하게 느껴졌다. 이를 악물고 견디다, 설핏 잠이 들었는데 꿈을 꾼 것이었다. 그 짧은 만남이 너무도 아쉬워 다시 꿈을 꾸려고 잠들기를 시도했지만, 외려 정신이 말똥말똥했다. 너무 추워서 그랬는지 몰랐다. 끝내 다시 잠들지 못하고 있는데, 능주가 당장 나와서 다른 곳으로 피하라고 해서 석굴을 빠져나왔다.
  
 민경이는 이를 악물고 가파른 길을 기어 올라갔다. 암벽 위로 올라가면 덕령이가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아니면 덕령이가 어디에 있는지 환히 내려다보일 것 같았다. 턱밑까지 차오르는 숨을 참고 손과 양발을 이용해 겨우 겨우 올라왔다. 뾰족한 나무에 찔려 몸이 생채기 투성이지만 한 손에는 석청 단지를 들고, 다른 손으로는 나무 밑동을 잡아당기고, 발로는 땅, 바위, 나무 등을 밀어가며 힘겹게 올라갔다. 암벽 위에 가까워지자, 드디어 덕령이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오히려 몸이 가벼워졌다. 암벽 위에 올라서서 부푼 마음으로 인근을 톺아보던 민경이는 덕령이가 보이지 않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리고 총소리를 들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또, 총소리를 들었다. 
 
 둔탁한 몽둥이로 머리를 가격 당한 듯했다.
능주가 총에 맞아 죽었기에 대답을 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총소리가 민경이 정신을 되돌리기라도 한 듯 그제야 덕령이가 이 자리에 영영 못 오겠구나, 싶었다. 사실은 꿈을 꾸고 난 후에 어느 정도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어쨌거나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다. 그 어떤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은장도만 떠오를 뿐이었다. 김세근 장사가 전사하자, 그의 부인은 초혼장을 지내고 자결했다고 했다. 김세근 장사의 부인처럼 민경이도 자결을 생각했다. 하지만 품에 은장도가 없었다. 석청 단지뿐이었다. 은장도가 없다면 단검으로 하면 되지. 민경이는 능주가 항용 단검을 품고 산에 오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까는 능주의 생사가 걱정돼 불렀지만, 이제는 단검이 필요해 능주를 불러야 했다.
 
  “능주 아저씨!”
능주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능주 아저씨!”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능주 아저씨!”
메아리조차 돌아오지 않았다.
  
 더 이상 부를 기운도, 움직일 기력도 남아있지 않았다. 
일어서야 하는데, 서는 것조차도 힘들었다. 민경이는 눈을 감고 광옥이를 떠올렸다. 용의주도한 오라버니가 걱정 말라고 했으니 광옥이는 안심이었다. 광옥이가 용안으로 떠난 후 속으로 얼마나 울었는지 몰랐다. 광옥이를 잡으러 올까 봐 얼마나 노심초사한 나날을 보냈는지 몰랐다. 수리동산에서 덕령이를 기다리다가 군복 차림의 무리가 눈에 띄면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지 몰랐다. 하지만 다행히 광옥이를 잡으러 군인들이 들이닥치지는 않았다. 이제는 광옥이가 안전하다는 생각에 왜 이렇게 마음이 차분하고, 편안해지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광옥이가 눈에 밟혔다. 민경이는 광옥이가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떠올렸다. 오라버니에게 광옥이가 덕령이 후손이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으니, 광옥이는 덕령이 후손인 광산김씨는 아닐 것이다. 틀림없이 다른 성씨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광옥이가 덕령이 후손이 아닐 수는 없다. 광옥이도 쉽사리 그걸 잊지 않을 것이고, 덕령이가 아버지란 사실을 부정하지도 않을 것이다. 다만 입 밖으로 드러내지 않을 뿐이리라. 역모자의 후손이라고 광옥이가 잡혀가지 않았으니 역모자의 아들이라고 낙인찍힐 일도 없을 것이다. 어쨌거나 대가 끊어지지 않을 테니, 며느리의 의무는 다 한 듯싶었다. 
 
 광옥이를 한 번만이라도 보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하지만 그보다는 미안함이 더 컸다. 덕령이의 무사귀환만을 빌고 빌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광옥이가 꼭꼭 숨어서 안전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일까. 민경이는 광옥이 꿈을 한 번도 꾸지 않았다. 아들 광옥이보다 남편 덕령이가 언제나 우선이었다. 광옥이는 안전하다는 생각 때문이었지만, 그게 아니라도 덕령이가 더 그리웠고, 더 기다려졌고, 더 걱정이었다. 광옥이를 조금만 더 생각했다면 꿈에서라도 만날 수 있었을 거 아닌가. 꿈에라도 만났으면 좋았을 걸 하는 후회가 끓어올랐다. 광옥이가 이해해주겠거니 하면서도 미안함 마음이 가시지 않은 건 어쩔 수 없었다. 
 
 연기 냄새가 났다. 어디선가 불이 난 모양이었다. 허둥지둥 올라오느라 급급해 주변을 살피지 못했는데, 보리암이 불타고 있거나, 왜군이 석굴 안으로 불을 지폈는지도 몰랐다. 석굴 안에 있었다면 열기에 피부가 익었을 것이다. 석굴을 잘 빠져나왔다는 안도감도 잠깐, 석굴에 남아 있을 경우를 상상하니 몸이 으스스 떨렸다. 생각만으로도 이러는데. 장군님은 생살이 타고, 껍질이 벗겨질 때 얼마나 아프셨을까. 생 다리가 부러졌을 때는 또 얼마나 아프셨을까. 통증을 참으시느라 또 얼마나 힘들었을까. 민경이는 덕령이가 겪었을 고초를 상상했다. 온몸이 바스러지는 듯했다. 

  “저기 있다, 생포하라!”
  왜군의 소리에 번쩍 눈을 떴다. 난생처음 본 무기를 든 왜군 무리가 암벽 위쪽으로 허겁지겁 몰려오고 있었다. 투구는 쓰지 않았고, 머리카락은 가운데를 홀라당 밀어버려 의병군과 차이가 확연했다. 원색이 가미된, 한복의 두루마기 같은 옷이 눈에 들어왔다. 색상은 조악해 보였다. 의상으로 미루어 짐작해도 의병이 아님은 틀림없었다. 김응회도 왜군이라고 알려주었다. 
  ‘능욕을 당할 수는 없다.’

  민경이는 코는커녕,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왜군의 손에 넘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낭떠러지로 몸을 던지면 어떤 게 코인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머리가 산산이 박살 날 것이다. 그렇다면 은장도가 없어도 되지 싶었다. 왜군 때문에 덕령이를 잃었는데, 그런 왜군을 처단하지는 못할망정 전과물로 코까지 베어 가게 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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