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칼럼 칼럼
고재종의 詩이야기/ 詩의 향기,삶의 황홀(43)고재종 칼럼위원(시인)

고래의 노래

에밀 졸라((1840~1902)의 장편소설 『테레즈 라캥』(1867)은 ‘눈먼 욕망’의 벌거벗은 모습을 치열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1852년 파리에 최초의 현대적 백화점 봉마르세가 오픈한 시간을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병약한 남편 카미유와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애정 없는 결혼 생활을 이어가던 테레즈에게, 어느 날 남편의 소꿉동무인 로랑이 찾아오면서 비극이 시작된다.

카미유와 달리 완숙한 남성미를 지닌 로랑에게 순식간에 마음을 빼앗기는 테레즈는 곧장 그와 함께 은밀한 밀회를 즐기게 되고, 둘은 서로에게 치명적으로 빠져든다.

야수와 같은 욕정으로 밀회를 즐기던 둘은 곧 밀회가 아닌 완벽한 사랑을 꿈꾸게 되지만, 거기엔 병약한 카미유라는 장애물이 있다. 그러나 이미 무서운 욕정에 사로잡힌 그들에게 나중에 ‘살인의 숙명적인 벌’이 되어버린 범죄 같은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결국 태양이 빛나는 아름다운 센 강으로 소풍을 가서 카미유를 물에 빠뜨려 죽인 뒤, 둘은 부부로서 모든 것이 완벽해진다. 하지만 카미유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완벽해질 줄 알았던 테레즈와 로랑은 죽음의 늪과 같은 카미유의 환영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죄의식에 사로잡히게 된다. 완벽한 살인이 남긴 것은 공포와 불면의 밤, 욕정이 사라진 자리에 무섭게 끓어오르는 증오, 신경과 피에 극단적으로 지배받는 발가벗은 동물성 속에서 생겨난 불신!

이것들은 이미 도를 넘어도 한참을 넘었다. 하지만 욕망이라는 기차에 브레이크는 없다. 그 불신과 죄책감 속에서도 또 다른 욕망이 꿈틀거리고 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까미유 어머니 라캥 부인의 돈을 빼앗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사랑을 얻기 위해, 그 다음에는 돈을 얻기 위해 그들은 스스로 지옥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런 두 사람에게 주어진 것은 고통과 파멸뿐이었다. 끝내 테레즈와 로랑은 자살을 하게 되는데, 이는 자살이 아니라 불신과 의혹 속에서 서로를 죽이는 상호 파멸에 이른 것이다.

치명적인 욕망의 처절한 파멸을 기록한 이 소설은 예의 ‘현대 상업의 대성당’으로 불린 백화점이 파리에 처음으로 생긴 때를 배경으로 탄생했다. 이는 결국 도시문명이 부추기는 욕망에 따른 노예로 살다 결국 욕망의 희생자가 되는 테레즈와 로랑의 속물성과 그 벌거벗은 욕망에 대한 자연주의적 고발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그것은 1860년대의 파리보다 몇 십 배는 더 ‘욕망이라는 현대성’으로 들끓고 있는 오늘날의 서울의 현실이라면, 그 눈멀고 벌거벗은 욕망은 훨씬 더 비대해졌을 것이라는 사실은 너무도 명학관화하다. 그러기에 2009년 박찬욱 감독은 이 소설을 리메이크하여 『박쥐』라는 영화를 만든 게 아니던가. 그런 욕망의 이상비대증을 앓고 있는 혹등고래를 통해 인간의 비극적 고독을 유추해 내고 있는 심진숙의 시를 보자.

외로움을 이기기 위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는
고래들의 이야기
고독하게 살아온 세월이 너무나 오래되어서
이름이 고래가 되었다는
그 말이 정말일까 묻는 것은 때로 유용한 질문일 것

어둡고 차가운 심해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고래들은
제 짝의 모습을 보는 것도 체취를 맡는 것도 포기해야만 했다는데
4천만 년 전 혹은 8천만 년 전부터라고도 하지
오직 청각에만 의지하여 견뎌 온 시간의 무게만큼이나 비대해진 몸집을
유탄처럼 날려서
해면 위로 솟구쳐 오르는 혹등고래

단 30초의 사랑을 위해
필사적으로 배를 발딱발딱 뒤집으며 지속하는 전희
예민해진 촉각을 집중시키며 허밍허밍
순식간에 거품을 뿜어내며 해류로 귀환하는 고래들

찰나의 충만한 기억으로 먼 길을 떠날 수 있다는
믿음이었지, 물살을 가르며 전진, 또 전진할 수 있었던 것은,
같은 주파수로 노래를 주고받으며
저 거대한 바다를 기꺼이 건너리
다짐하는 동안에도 고독은 자꾸만 자꾸만 밀려오고 마는 것이었지

그래서 아직도 그 이름은 고래라고 하지
가슴에 들어앉은 망망대해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쳐 부르는
그 노래 그친 듯 그칠 줄을 모르지.

-심진숙, 「고래의 노래」

고래는 외롭다. 혹등고래는 외롭다. 몸이 비대해서 외롭다. 비대해진 욕망의 존재가 그 욕망으로 인해 더 슬프다. 그 비대한 욕망 속에 모든 존재들을 쓸어 담아야 하기 때문에 외롭다. 그 욕망의 아가리로 모든 것을 집어 삼키야하는 이 외로운 존재는 제 욕망의 상징처럼 등에 혹이 부풀어 있다. 혹등고래는 그래서 고독하다.

어둡고 차가운 심해에서 살아남기 위한 그 맹목적 욕망만으로 이상비대증에 시달리는 혹등고래에게 어떤 친구가 있겠는가. 수천만 년 전부터 축적되어온 욕망, 그 탓에 시각도 후각도 퇴화된 채 오로지 ‘눈먼 욕망’만으로 무슨 연인을 찾겠는가. 그래서 고독할 수밖에 없다.

한데 그 눈먼 욕망이 어쩌다 또 다른 눈먼 욕망을 만나 불과 30초간 그 ‘어둡고 차가운 심해’ 속에서 물 위로, 공중으로 치솟아 오른다. 단 30초간의 공중에서의 교미를 하기 위해서다. 이상비대증의 눈먼 욕망의 성취치고는 참으로 초라하다.

‘발딱발딱’이건 ‘허밍허밍’이건 그런 교미, 섹스 행위가 ‘순식간의 거품’으로 허망하게 꺼져버리는 그 참람한 고독을 보라. 태산처럼 비대해진 욕망의 덩어리가 기껏 ‘찰나’일 수밖에 없는 종족번식의 교미거나 쾌락갈구의 섹스로, 그것이 남기는 거품으로, 다시 어둡고 차가운 심해의 가혹성 속에 갇히게 되는 이 비극적 고독은 차마 말로 표현할 길이 없다.

그 “찰나의 충만한 기억으로 먼 길을 떠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다시 심해를 전진하겠다고 다짐하지만, 이상비대증의 욕망으로 인한 고독은 그야말로 다시 심해의 거대한 물살처럼 밀려오고야 마는 것이다. 그래서 고독하다고, 고독하다고 ‘고래고래’ 처절하게 외치는 것 아닌가.

욕망의 용광로로 끓고 있는 현대문명 속에서 결국 욕망의 존재로 살아가기 위해 욕망이라는 이상비대증을 앓고 있는 현대인들이 누리는 쾌락은 어느 정도인가. 권력을 얻고, 그 위력으로 성을 착취하고, 진영논리로 상대를 제압하고, 손바닥 뒤집듯 하는 생각과 행동으로 목전의 쥐꼬리만 한 이익을 탐하는, 이 끔찍하리만치 비열한, 이 상스럽고 사악한 쾌락은 과연 얼마만큼이나 짜릿하고 황홀한 것인가. 아니 그것이 그토록 짜릿하고 황홀한 것이라면 왜 고래는 다시 ‘고래고래’ 소리치는가. 가슴에 들어앉은 망망대해 같은 현실은 왜 이리 가혹한가.*

장광호 편집국장  dnnews@hanmail.net

<저작권자 © 담양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장광호 편집국장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오늘의 주요뉴스
[AI-읽어주는신문]
담양군복지재단, 2천만원 모금 추진
[AI-읽어주는신문]
Damyang Welfare Foundation Pus...
[AI-읽어주는신문]
潭阳郡福利基金会,推๢...
[AI-읽어주는신문]
Quỹ Phúc Lợi ...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