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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종의 詩이야기/ 詩의 향기,삶의 황홀(44)고재종 칼럼위원(시인)

가을의 시 두 편 

 먼길 가는 모양이다 
 동네 어귀 느티나무 그늘 아래 
 어떤 부부가 버스를 기다리며 서 있다 
 조금은 떨어져 선 두 사람은 
 목도리가 같아서인지 한눈에 부부 같다 
 지아비가 한 손을 올린 채 앞으로 나와 있고 
 지어미는 조금 뒤에서 웃고 있다 
 시골버스의 유일한 승객인 나는 
 그 부부를 발견하고 내심 반가웠지만 
 운전기사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지나치는 게 아닌가 
 두 사람이 늘 거기 서 있으면서도 
 한번도 버스를 탄 적이 없다는 듯이 
 아아, 버스로는 이를 수 없는 먼 길 가는 모양이다 
 그 부부는 이미 오랜 길을 걸어 저기 당도했을 것이고 
 잠시 나무 그늘에서 쉬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정갈하게 풀을 먹인 광목 목도리는 
 누가 둘러주고 간 것일까 
 목도리에 땀을 닦고 있는 그들을 뒤돌아보니 
 미륵 한쌍이 석양 속으로 사라진다 
 두 개의 점, 흰 광목빛 
                                    -나희덕, 「흰 광목빛」 

텅 빈 시골버스를 타고 어느 동네를 지나친다. 동네 어귀 느티나무 그늘 아래엔 흰 광목 목도리를 두르고 버스를 기다리는 부부가 서 있다. 아니다. 이는 시적 화자의 착각이다. 시적 화자는 시골버스의 유일한 승객으로서의 반가움 때문에 그들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을 거라고 여겼는지 모른다. 그러나 운전기사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냥 그들을 지나쳐 버린다. 아마 운전기사는 반복되는 그 운행 길에서 어쩌면 거기 늘 그렇게 서 있는 그들이 승객이 아니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나는 '어쩌면 늘 거기 서 있는 그들'이라고 말해 버렸다. 그렇다. 어쩌면 그들은 흔히 어느 동네에나 있기 마련인 실성한 사람으로, 그러기에 그 누군가를 기다려 늘 동네 어귀에 나와 버스를 향해 한 손을 올리거나 웃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시적 화자는 여기서 되레 상상력을 발동시킨다. 그들은 아마 먼 길 가는 사람들인 모양으로, 이미 오랜 길을 걸어 거기 당도했을 것이고, 지금은 잠시 나무 그늘에서 쉬고 있는지 모른다는 상상을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실성한 자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서 있는 피폐한 시골 현실의 직접적인 제시 이전에 우리 삶에는 항상 "버스로는 이를 길이 없는 먼 길"이 있다는 조용하지만 좀 더 깊은 존재론적 깨달음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퇴락한 동네에서 누군가를 애써 기다리는 실성한 사람일 수도 있고, 존재의 먼 길을 가는 나그네에 대한 상상일 수도 있고, 어쩌면 "미륵 한 쌍이 석양 속으로 사라진다" 걸로 보아 거기 동구에 서 있는 미륵불일 수도 있다. 문제는 그것들이 두 개의 점, 곧 흰 광목빛으로 차창 뒤에 남는다는 것이다. 이는 누구를 애절하게 기다린다거나, 땀을 흘리며 존재의 먼 길을 간다는 일이 아직 '흰 광목빛'으로 상징되는 삶의 순수의 길일 수 있다는 얘기인 것인가.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목도리의 흰 광목빛 이미지만 선연하게 남겠는가.

물론 이 시는 자식 하나 찾아오지 않는 시골의 노부부가 치매기 때문에 늘 정류장에 나와 자식이거나 누군가를 기다리는 모습으로 읽는 것이 시의 기본값에 충실하리라 생각된다.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깝다는 말씀을 아시는가 이것은 나락도 거두어 갈무리하고 고추도 말려서 장에 내고 참깨도 털고 겨우 한가해지기 시작하던 늦가을 어느 날 농사꾼 아우가 한 말이다 어디 버릴 것이 있겠는가 열매 살려내는 햇볕, 그걸 버린다는 말씀이 당키나 한가 햇볕이 아깝다는 말씀은 끊임없이 무언갈 자꾸 살려내고 싶다는 말이다 모든 게 다 쓸모가 있다 버릴 것이 없다 아 그러나 나는 버린다는 말씀을 비워낸다는 말씀을 겁도 없이 지껄이면서 여기까지 왔다 욕심 버려야 보이지 않던 것 비로소 보인다고 안개 걷힌다고 지껄이면서 여기까지 왔다 아니다 욕심도 쓸모가 있다 햇볕이 아깝다는 마음으로 보면 쓸모가 있다 세상엔 지금 햇볕이 지천으로 놀고 있다 햇볕이 아깝다는 뜻을 아는 사람은 지금 아무도 없다 사람아 사람아 젖어있는 사람들아 그대들을 햇볕에 내어 말려 쓰거라 끊임없이 살려내거라 놀고 있는 햇볕이 스스로 제가 아깝다 아깝다 한다 
                              -정진규,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깝다」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깝다”는 말을 왜 모르겠는가. 나락은 거두어 공판에 내고, 고추는 말려서 오일장에 내고, 참깨는 진즉 털어서 기름을 짜느라 사실 부엌의 부지깽이 손이라도 빌려야 할 정도로 바쁘지 않았던가. 그러고도 남아서 아직도 무진장하게 쏟아지는 가을 햇볕이 어찌 아깝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 햇볕이 차가워지고 음산해지기 전에 장작도 패서 쌓고, 김장독도 묻고, 문풍지도 새로 발라야 하는 등 할 일은 여전히 많다. 

그런데 이 말의 진정한 의미는 농사를 지어보면 알게 된다. 그렇게 햇볕은 무진장하게 쏟아지는데 일손이 딸린 탓에 미처 나락을 거두지 못해 나락을 말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때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깝다고 말한다. 또 남들과 같이 백석지기 논이 아니라 뙈기밭 몇 섬 수확이라 더 말릴 것이 없는 경우, 그때 그냥 그렇게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깝다고 말한다. 햇볕 자체가 주체적으로 ‘놀고 있는’ 것이라기보다 사람의 입장에서 유용하게 쓰려 해도 쓸 수 없는 햇볕을 ‘놀리고 있는’ 것이 아깝다는 말이다. 

이렇게 농사꾼들이 쓰는 말뜻을 잘못 이해했다고 해도 이 시의 의미가 감소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원래 뜻의 왜곡이 이 시의 창조성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먼저 “햇볕이 아깝다는 말씀은 끊임없이 무언갈 자꾸 살려내고 싶다는 말이다”라는 구절은 농사꾼들이 좋은 햇볕을 놀리는 것을 너무 아까워하는 심정과 일맥상통한다. 그렇게 좋은 햇볕의 때에 말릴 것 말리고 갈무리할 것 갈무리하고 싶어 하는 것은 사람과 자연의 순리이고, 그 순리를 따르는 것은 무언가를 살려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령 ‘작년에 산 바지가 보푸라기 한 올 일지 않았는데 아이가 너무 커서 버릴 수밖에 없으니 너무 아깝다’라는 말을 보라. ‘아깝다’라는 말엔 항상 ‘버린다’라는 말이 전제되어 있거나 내포되어 있다. 이것을 깨달은 시인은 단박에 저 아까운 햇볕을 버려야 쓰겠는가라고 못 박는다. 그리고는 비약하여 앞으로는 ‘버린다’는 말이나 이와 동의어인 ‘비워낸다’는 말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진짜 써야할 욕심도 다 못 쓴 주제에, 자기가 무엇을 이루었다고 욕심을 버린다느니 마음을 비운다느니 하는가. 그런 도사연하는 짓은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햇볕이 아깝다는 마음으로 보면 욕심도 크게 쓸모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말은 자기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쓸모 있는 햇볕이 지천으로 놀고 있는데 그런 햇볕을 아까워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하다못해 젖어있는 마음이라도 내다 말릴 일인데 그러지 않으니 “놀고 있는 햇볕이 스스로 제가 스스로 아깝다 아깝다 한다”는 것이다. 

장광호 편집국장  dn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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