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칼럼 칼럼
고재종의 詩이야기/ 詩의 향기,삶의 황홀(45)고재종 칼럼위원(시인)

딱새 한 마리

오규원 시인은 존재론적 상상력으로 날것의 시학을 펼친다. 
이 날것의 시학은 모든 존재 곧 두두물물이 자기존재의 의미를 스스로 말하게 하는 선종의 선적 관찰 같기도 하다. 그러기에 모더니즘이나 리얼리즘에 투철한 시선으로는 매우 밋밋하고 슴슴할 것도 같은 시적 표현들이 많다.

하지만 지금까지 과잉의 이미지와 과잉의 해석으로 난해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던 모더니즘 시들과 삶의 핍진성과 이념의 과잉으로 신물 나게 하는 리얼리즘의 시를 일거에 뛰어넘으며 그야말로 날것, 익히지 않고 가공하지 않은 날것의 이미지를 투명하게 보여준다. 대상이 존재의 위의와 세계의 비밀을 스스로 말하게 하는 관찰적 상상력이 작동했기 때문이다.      

한국의 모더니즘 사조에 누구보다도 앞장섰던 오규원의 시가 중반 이후에 이처럼 ‘날 것의 시학’으로 바뀐 것은 우리 시단의 한 사건이었다. 
이는 시인이 폐기종으로 인해 망가진 건강을 도모하고자 서울에서 멀리 강원도 영월의 오지로 거처를 옮긴 데서 일어난 자기성찰에 의한 시적 변모였다.

지금껏 모든 존재와 사물을 자기의 지식으로 해석을 하고 이에 관념을 뒤집어 씌워 언어의 추상화를 도모한 것이 그간의 시작과정이었는데, 놀랍게도 서울에서 강의를 하고 몸을 쉬러 영월에 들면 어제 봤던 존재와 사물들은 시인 없이도 잘 존재하다가 오늘 자기 본래의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더라는 것이다. 그것을 보고 그간 사물들에게 인간의 관념을 뒤집어 씌어 왜곡하고 호도한 죄가 너무나 커서 그로부터 모든 두두물물을 있는 그대로 보겠다는 생각이 ‘날것의 시학’을 낳게 된 것이다. 

메를로-퐁티의 ‘살 존재론’은 화가 세잔이 일구어낸 예술적 삶의 경지를 보여주면서 전개한다. 메를로-퐁티는 『의미와 무의미』라는 저서에서 세잔이 “풍경이 내 속에서 자신을 생각한다. 나는 풍경의 의식이다”라는 말을 했다고 전한다. 이는 “저 꽃이 내 속에서 자신을 생각한다. 나는 저 꽃의 의식이다.”라고 바꿀 수 있으니, 오규원의 시에서 대상이 가공되지 않은 채 날것 스스로 자기를 밝히게끔 하는 표현법과 일맥상통한다.

조광제가 『미술 속, 발기하는 사물들』에서 메를로-퐁티에 대한 철학을 해설하면서 “보는 이가 없이도 보이는 모습 그대로 사물들이 존재함을 확신한다.…그것은 감각하는 사람이 없이도 감각적인 사물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급기야 그것은 감각된다는 것이 감각한다는 것보다 근본적으로 먼저 성립한다는 것을 뜻한다.”고 한 말도 오규원 시의 이해에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딱새 한 마리가 잡목림의 
산뽕나무 가지에 앉아 허공에서 
무엇인가 찾고 있다 딱새의 그림자도 
산뽕나무에서 내려오지 않고 
가지에 그냥 붙어있다 
박새 한 마리도 산뽕나무 뒤편
붉나무 가지를 두 발로 잡고 있다
그러나 산뽕나무 저편 팥배나무에서
문득 날아오른 새 한 마리는 
남쪽의 푸른 하늘에 몸을 숨기더니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새가 몸을 숨긴 그 하늘 아래는 
집을 짓고 사람들이 산다 
                                -오규원, 「새와 집」

딱새 한 마리가 잡목림 속의 산뽕나무 가지에 앉아 허공에서 무엇인가를 찾고 있다. 이는 딱새가 나뭇가지에 앉아 고개를 갸우뚱하고 허공을 바라보고 있거나, 그러다가 하늘을 향해 콕콕콕 부리를 쪼아대는 모습을 “허공에서/무엇인가 찾고 있다”고 표현한 것이리라. 그 다음 “딱새의 그림자도/산뽕나무에서 내려오지 않고 가지에 그냥 붙어 있다”고 했는데, 이는 관찰의 눈을 통해서 본 것이 아니라 관찰의 상상력으로 본 것이다.

왜냐하면 뽕나무 가지가 웬만치 굵지 않고서는 밑에서 올려다보는 나뭇가지에 딱새 정도의 그림자가 붙어 있는 모습이 보일 수도 없거니와 그 딱새 그림자가 나무 밑의 땅 위에까지 드리우도록 짙을 수도 없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귀신이나 신이 아니고서는 이 지상의 모든 존재가 갖게 되는 그림자를 갖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으레 딱새 그림자는 딱새가 앉아 있는 그 나뭇가지에 붙어 있으리라는 생각에서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었겠다.

한데 그보다 더한 여실지견은 딱새도 그림자가 있을 것이지만 대개 존재의 업이나 어두운 면으로 상징되는 그 그림자를 지상에 드리우지 않고 그냥 가지에 붙어 있는 것을 관찰한 것만으로 만족할 뿐이지, 그것을 통해 어떤 모더니즘적 사유를 덧씌우는 짓을 더는 행하지 않겠다는 생각에서 그렇게 표현한 것 아닐까. 한데 그처럼 박새도 산뽕나무 뒤편의 붉나무 가지를 두발로 붙잡고 있다. 앞에서 딱새는 가지에 ‘앉아’ 있는데 박새는 가지를 ‘붙잡고’ 있다.

이는 앉아 있는 그대로의 생명의 존재가 생명력를 구가하는 의지의 존재로 바뀌며 삶에 대한 신비와 아름다움에 취한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눈에 보이는 그대로를 표현한 것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산뽕나무 저편 팥배나무에서/문득 날아오른 새 한 마리는/남쪽의 푸른 하늘에 몸을 숨기더니/다시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기 때문이다. 욕망과 의지의 존재를 표현한 것 같지만 불교식으로 말하면 모든 존재는 내외가 모두 공(空)이어서 금방까지 산뽕나무 뒤편 팥배나무에 있던 새 한 마리가 문득 날아올라 남쪽하늘로 날아가 버린 뒤로는 이제 새는 없다.

더구나 시에서 산뽕나무 ‘뒤편’, 산뽕나무 ‘저편’ 등의 표현으로 시적대상들이 존재하는 공간의 공간감을 창출하며 “새가 몸을 숨긴 그 하늘 아래는/집을 짓고 사람들이 산다”고 표현한다. 이는 허공에서 지상까지, 잡목림에서 저기 남쪽까지, 딱새에서 박새까지, 산뽕나무에서 팥배나무까지 모든 존재들이 천연덕스럽게 존재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허공’ 아래인 땅에서 사람들이 집을 짓고 산다고 하며 모든 찬란하고 아름다운 존재들도 결국에는 공이라는 적멸과 열반을 사는 존재라는 것을 존재들이 스스로 말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모든 존재들을 있는 그대로의 자리에 배치해 놓았을 뿐인데 우리가 감각하고 생각하기 이전에 먼저 존재하고 있는 바대로 그들은 스스로 우리에게 많은 것을 보여주거나, 보는 사람으로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자기들의 비의에 우리를 초대하여 우리를 되레 만져대기까지 하며, 그 우주적 통찰의 자리에 사람들도 한 자리 끼워주는 요량이다.*     

장광호 편집국장  dnnews@hanmail.net

<저작권자 © 담양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장광호 편집국장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