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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종의 詩이야기/ 詩의 향기,삶의 황홀(46)고재종 칼럼위원(시인)

집을 그리워하다
벌써 한해가 저무는군요. 이럴 때 저는 모든 것들로부터 돌아와 ‘집’에 머물며, 아름다운 집을 사유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자본이 압박하는 길을 따라 넓은 평수며 좋은 전망이나 따지는 집을 좇습니다.

우리의 집들은 한마디로 자본의 핵심부인 ‘시장통 네거리’에 놓인 채 온갖 모욕과 상처와 악몽을 견뎌야 합니다. 시장통 네거리에서 리어카에 놓인 갈치를 팔거나 화려한 백화점에서 명품 백에 혈안이 되거나, 사고파는 이 자본과 욕망의 시장에서 뒤처지면 도공의 손에 짓이겨지고 패대기쳐지는 찰흙처럼 만신창이가 되어 버립니다. 그럼에도 집에는, 가정에는, 지상에는, 아이들이 있고, 아버지들이 찾아와 그 아이들을 옹송옹송 끌어안습니다.

지상에는
아홉 켤레의 신발.
아니 현관에는 아니 들깐에는
아니 어느 시인의 가정에는
알전등이 켜질 무렵을
문수(文數)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을. 

내 신발은
십구문반(十九文半).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그들 옆에 벗으면
육문삼(六文三)의 코가 납작한
귀염둥아 귀염둥아
우리 막내둥아.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얼음과 눈으로 벽(壁)을 짜 올린
여기는
지상.
연민(憐憫)한 삶의 길이여.
내 신발은 십구 문 반.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십구 문 반의 신발이 왔다.
아니 지상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 박목월 「가정」

십구문 반의 신을 신고, 얼음과 눈으로 벽을 짜 올린 지상의, 연민의 길을 걸어와 댓돌에 놓인 아홉 강아지 같은 새끼들의 옹송옹송한 신발을 보고 흐뭇해하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가 미소하는 집이라면 말입니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라고
자장면집 한켠에서 짬뽕을 먹는 남녀
해물 건더기가 나오자 서로 건져주며
웃는다 옆에서 앵앵거리는 아이의 입에도
한 젓가락 넣어주었다
면을 훔쳐올리는 솜씨가 닮았다
- 최영철 「인연」

또 사랑하는 가족이 화기애애하게 웃는 집이라면 더욱 좋겠지요. 최영철의 시 「인연」속의 주인공 남녀는 아마도 결혼기념일을 맞았거나 어느 한쪽의 생일을 맞아서 외식을 나온 모양입니다. 한데 그 특별한 날 온 곳이 기껏해야 자장면집인 걸로 보아 노동자나 서민의 삶을 면치 못한 부부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해물건더기가 나오자 서로 건져주며 웃는 걸로 보아 아직도 그들 사이엔 꿋꿋하고 씩씩한 사랑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그들에겐 옆에서 앵앵거리는 아이도 있지 않는가요. 한데 아이에게 한 젓가락 넣어주자 그 면을 훔쳐 올리는 솜씨가 부모를 닮았다고 하는, 그 사실을 포착해내는 시인의 예리한 눈을 보십시오. 이런 아름다운 풍경의 집이 세상에는 더 많을 것이라고 기대해봅니다. 하지만 그런 행복한 현실의 집들이 영원할까요? 이 지상에서 그런 자식들과 더불어 오래오래 살 것 같지만 유한성에 안에 놓인 인간의 집들은 다시 녹슬고 허물어지고 사라집니다.

그러니 실낙원의 인간으로서는 궁극적으로 돌아갈 집을 또 다시 찾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 때문에 종교가 생기고 철학이 생긴 것이 아닌가요. 그리하여 천국을 만들고, 철인공화국을 만들고, 혹은 영생불사의 구호를 우리의 삶 속에 세뇌시키기도 합니다.시는 그런 사기를 치지 않습니다. 시는 뜨락의 나무에 눈꽃이 피는 그 황홀을 단 한번이라도 보게 합니다. 시는 문득 아내의 눈가에 패인 주름을 보고 연민으로 가슴 젖게 하는 집을 사랑합니다.

저 언덕 너머 어딘가/그대가 살고 있을까/계절이 수놓은 시간이란 덤 위에/너와 난 나약한 사람/바람이 닿는 여기 어딘가/우리는 남아 있을까/연습이 없는 세월의 무게만큼 더/너와 난 외로운 사람/난 기억하오 난 추억하오/소원해져 버린 우리의 관계도/사랑하오 변해버린 그대 모습/그리워하고 또 잊어야 하는/그 시간에 기댄 우리
시는 바리톤 고성현의 「시간에 기대어」라는 노래가 흐르는 집을 눈물 젖도록 그리워하게 합니다. 시간에 기대어 변해가는, 그래서 시간에 기대어 그리워하고 또 잊어야 하는 유한한 인간들의 슬픔을 위로하는 노래, 그런 노래가 흐르는 집을 사무치도록 꿈꾸게 합니다.*   

장광호 편집국장  dn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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