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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알기1/ 담양이야기(70) 우리지역 어떻게 생겨났나⑫

◾담양도호부와 창평현으로 유지되다

담양은 조선시대에 담양과 창평 두 개의 고을이 유지된다. 그리고 일종의 특별행정구역이라 할 갑향(甲鄕), 정석(貞石)부곡, 장평(長平) 부곡도 있었다.

갑향은 창평현에 속했는데 1435년 담양부에 합해진다. 담양과 창평 두 고을은 군사적 중요성, 국사(國師)와 중궁의 출생지라는 명분으로 승격되기도 하며, 강상죄를 범한 사건이 있어 강등되기도 한다.

먼저 승격의 경우는 태조 4년(1395)에 국사 조구(祖丘)의 태생지라 하여 담양감무가 담양지군사(潭陽知郡事)로 승격된다. 조구는 천태종계 승려로 1394년에 국사가 되었다. 

또, 정종 원년인 1399년에는 중전 정안왕후 김씨(1345~1412)의 외향(外鄕)이라 하여 담양군이 담양부로 승격된다. 정안왕후(뒤에 후덕대왕비라 함)는 경주김씨 김천서(金天瑞)의 딸이다. 뒤에 태종 13년(1413)에는 담양부를 담양도호부라 했다.

담양군이 강등의 경우는 성종 5년(1474)에 창평현 사람으로 전의감 판관을 지낸 강구연이란 사람이 현령인 전순도(全順道)를 능욕한 일로 창평현이 혁파됐다가 5년만인 1478년에 다시 현으로 복구된다.

영조 4년(1728)에는 역적 미구(美龜)가 태어난 곳이라 하여 담양도호부가 현으로 강등되며, 이 시기에 담양부사를 지낸 심유현은 역모를 꾀했다 하여 처형되기도 한다. 이후 10년만인 1738년 도호부로 다시 승격된다. 

또, 영조 38년(1762)에는 좌수 이홍법·이창기 등이 역모를 꾀했다 하여 다시 담양도호부가 현으로 강등됐다가 10년만인 1771년 복호된다.

한편, 정조 17년(1793)에는 창평현의 치소가 고산(현.고서면 고읍리)에서 삼지천리(현.창평면 창평리)로 옮긴다. 이후 옛 치소터를 고읍으로 부르게 된다.

200여년전 기록(1789년 발간한 <호구총수>)에 의하면 담양도호부는 20개면에 5,688호, 18,270구(口), 245개리로 편제되어 있었다. 창평현은 10개면에 2,041호, 7,600구(口), 103개리 였다.

◾담양과 창평이 합해지다.

근대에 접어들어 담양은 지방관제의 대폭적인 개혁의 영향을 받았는데 1895년에 8도제가 23부제로 바뀌면서 담양과 창평은 남원부 산하 20개 군에 소속되었다.

1896년 8월에 23부제가 없어지고 종전의 8도 가운데 전라·충청·경상·함경·평안도를 남북으로 나누면서 13도제가 시행되자 담양군과 창평군은 전라남도의 관할에 들었다.

1908년에 옥과군이 창평군에 합해지기도 했다. 이어 일제강점기인 1914년에 현재의 행정구역이 확립됐다. 옥과는 다시 곡성군으로 넘어가고 창평군은 창평면이 되어 담양에 합해지며, 장성 갑향, 광주 갈리·대치(대전면) 등을 편입하여 13면 139리를 관할하게 된다.

1943년 담양면이 담양읍으로 승격됨으로써 고서면·금성면·남면·대덕면·대전면·무정면·봉산면·수북면·월산면·용면·창평면 등 1읍 11개면의 현재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1955년과 1957년 1983년에 약간의 개편이 있었으나 큰 골격은 변하지 않고 오늘에 이른다. 다만, 남면은 한국가사문학관과 가사문학의 산실이라 하여 가사문학면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장광호 편집국장  dn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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