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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종의 詩이야기/ 詩의 향기,삶의 황홀(47)고재종 칼럼위원(시인)

산책 끝의 복자수도원

텔레비전의 뉴스나 시사프로그램을 보지 않은 지 오래다. 날이면 날마다 밥 먹고 싸움 궁리만 하는지 욕설과 조롱, 편견과 억측, 날조된 사실과 황당한 궤변, 견강부회와 우김질 등 가짜뉴스와 개소리(Bullshit)로 온 나라를 더럽히고 있는 여야 정치인들의 한심하고 저질스런 작태를 단 1초라도 보고 듣기 싫어서이다.

텔레비전을 끄고 나니 이제는 휴대폰이라는 게 늘 손에 들려 있어 실시간으로 뉴스를 전달해주지만, 그걸 손에서 내려놓으려고 무척 애를 쓴다. 아예 없애버리고 싶어도 휴대폰 하나로 강의나 글 청탁받고 사는 사람이라 그럴 수도 없어 괴롭다.

그때마다 나는 다시 시로 돌아가 마음의 평정을 찾는다. 특히나 아래 작품을 쓴 이진명의 담박(淡泊)하면서도 마음의 심연, 영혼의 창공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여러 시들이 너무 맑아서 자주 읽는다. 새해 첫 시다. 

내 산책의 끝에는 복자수도원이 있다 
복자수도원은 길에서 조금 비켜 서 있다 
붉은 벽돌집이다 
그 벽돌빛은 바랬고 
창문들의 창살에 칠한 흰빛도 여위었다 
한낮에도 그 창문 열리지 않고 
그이들 중 한 사람도 마당에 나와 서성인 것 본적 없다 
둥그스름하게 올린 지붕 위에는 드문드문 잡풀이 자라 흔들렸고 
지붕 밑으로 비둘기집이 기울었다 
잠깐이라도 열린 것 본 적 없는 높다란 돌기둥에는 
순교복자수도회수도원(殉敎福者修道會修道院)이라 새겨진 글씨 흐릿했다 
그이들은 그이들끼리 모여 산다 한다 
저녁 어스름 때면 모두 
성의(聖衣)자락을 끌며 긴 복도를 나란히 지나간다고 한다 
비스듬히 올라간 담 끄트머리에는 녹슨 외짝문이 있는데 
삐긋이 열려 있기도 했다 
숨죽여 들여다보면 
크낙한 목련나무가 복자수도원, 그 온몸을 다 가렸다 
내 산책의 끝에는 언제나 없는 복자수도원이 있다 
- 이진명, 「복자수도원」 

‘산책 도중의 명상’을 피력한 이진명의 시 「복자수도원」은 서울 성북동에 있다는 ‘복자수도원’을 보고 건져 올린 시이지만, 그러나 실재와는 별 관계가 없다. 복자수도원은 다만 하느님의 말씀과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자들, 곧 복음과 복자들이 사는 신의 마을이다.

겉으로는 빛바랜 벽돌집으로 길에서 비켜 서 있고, 창문의 창틀도 흰 도색이 벗겨진 채 열릴 줄 모른다, 거기에 사는 사람들 중 어느 하나도 마당에 나와 서성거린 걸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정적과 침묵으로 일관돼 있다.

그러니 둥근 지붕 위로는 드문드문 잡풀이 자라 있고, 지붕 밑으로는 비둘기집도 기울었고, 높다란 대문은 잠깐이라도 열린 것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오랜 세월과 탈속 가운데 놓여 있다. 

그이들은 그이들끼리 모여 살며 “저녁 어스름 때면 모두/ 성의자락을 끌며 긴 복도를 나란히 지나간다”고 누군가 일러주었지만, 시인은 더 이상 이 수도원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담 끄트머리의 외짝문이 삐긋이 열려 있어 숨죽여 들여다보기라도 하면 크낙한 목련나무가 수도원의 온몸을 가려서 더 볼 수도 없다. 그럼에도 “내 산책의 끝에는 언제나 없는 복자수도원이 있다.” 한마디로 번잡한 일상 뒤의 산책 끝에, 일상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복자수도원이 실존의 대면(對面)으로 터억 존재하는 것이다. 

산책은 실존의 진정한 의미를 만나러 가는 길인데, 사실 그 길에서 시인은 쓸쓸하고 덧없는 삶의 조건을 만나기가 일쑤다. 다음의 시 「강변에 이르렀을 때」가 이의 증거가 된다. “걷고 걸어와/ 강변에 이르렀을 때/ 모래들판은 흐지부지/ 강물에 잠겨 들어가고/ 무언가 좀 더 확실한 것/ 그럴듯한 구조물 하나 서 있지 않고/ 흐지부지 모랫벌처럼 없어지는 것/ 그 보잘것없음만이/ 방금 물위를 쪼던 새처럼/ 분명하게 떠 있다/ 이 마을에서 오래 살았는지/ 수초 사이 애들이 버렸을 상자곽을 떠내며/ 편안한 모습의 한 어른이 와서/ 흐지부지 물속으로 들어가 버린 모래들판의 길을/ 삐걱이며 나무배에 싣고 간다.” 

무언가 잔뜩 기대하고 걷고 걸어와 강변에 이르렀지만 무언가 좀 더 확실하고 그럴듯한 구조물 하나 없이 모래들판만 흐지부지 강물로 없어진다. 그 ‘보잘것없음’만이 존재하는 삶의 이 허망함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이 배신을 어떻게 견딜 것인가. 
 
문학평론가 이남호에 의하면, 놀랍게도 시인은 이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과 극복으로서의 새로운 세계에 대해 무모한 희망을 갖지 않는다. 대신 소극적인 용서와 포용으로 세계의 소리에 겸허하게 귀를 기울이는 자세를 취한다.

하이데거는 인간의 실존이란 세계와의 대화이며 보다 바람직한 것은 세계의 소리에 가만히 귀 기울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주체의 적극적인 의지가 개입되는 <보기seeing>보다 주체가 겸허하게 열려 있는 <듣기hearing>를 중요시한다.

그는 심지어 “우리는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되며 다만 조용히 귀 기울이고 있어야 한다”며 수동성을 강조한다. 이진명의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자세도, 하이데거와 비슷하게, 은폐되어 있는 세계의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자아를 겸허하게 열어두고 세계의 소리에 조용히 귀 기울이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그의 생각은 「밤에 용서라는 말을 들었다」라는 시에 집약되어 있다. “누구였을까. 낮고도 느린 목소리. 은은한 향내에 싸여. 고요하게 사라지는 흰 옷자락, 부드러운 노래 남기는. 누구였을까. 이 한밤중에”. 이렇듯 그 이상한 전언인 ‘용서’라는 말을 남긴 그 누구에 대한 귀 기울임이 이진명의 시인 것이다. 

다시 본 작품으로 돌아가면, 산책 끝에서 늘 만나기는 하지만 신의 마을인 복자수도원은 닫혀 있고, 시인은 그곳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삐긋이 열려 있는 외짝문으로 조금 스며 나오는 빛으로 자신의 존재를 겨우 밝힐 뿐이다.

“마치 마티스의 그림 「테라스에 앉아 있는 자라」와 같이 고독과 정적의 푸른빛에 휩싸인 채로 시인은 자신의 내면의 아픔을 오래 응시한다. 그리하여 그의 시는 백단향과 같은 향기를 지닌다. 그 향기는 슬프고 은은하고 아름답다.

신전의 향로에서 피어올라 그 신전 밖에서 간절히 간구하는 인간들에게까지 다가가 평화를 준다”.(이남호) 복자수도원은 아무런 의미도 없이 묘사로만 일관된 시 같지만, 사실은 시인의 순정한 마음과 시적 전략이 맞아 떨어진 수일한 시이다. 시란 이렇게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듯하면서도 큰 깨달음을 주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시와 구도 행위가 하나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껏 시 앞에서 만큼 정결해본 적이 없다. 시를 쓰면서 무엇을 바라지도 않고, 시를 쓰면서 진정스러워지고, 시를 쓰면서 삿된 마음이 눈 녹듯 녹아내리고, 시를 얘기할 때 가장 행복해지고, 시를 쓰면서 세계와 존재 자체가 사막 하늘에 뜨는 별이나 오로라처럼 신비로워지는, 그런 경험들을 하곤 한다.

다만 욕심 하나는 선승들이 화두(話頭) 하나를 치켜들고 크게 의심하며 생사의 일대사와 전쟁을 하는 것처럼, 모자란 재능으로나마 나 스스로를 감동시킬 수 있는 작품 한 편을 위하여 오늘까지 애써 보지만 갈 길은 멀고 저녁 비는 내리고 있다.*

장광호 편집국장  dn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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