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번째 꿈, 광풍각을 짓다> 제53화

 애양단을 다 쌓고 나서 한 달쯤 지나 , 창평 유천리와 삼천리에 산다는 새파란 선비 네 명이 양산보를 찾아왔다. 네 사람 모두 관례를 치룬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도포에 갓을 쓴 모양세가 어딘지 불편해보였다. 얼핏 보아 열 대 여섯 살 안팎으로 짐작되었다. 양산보는 그들을 광풍각으로 맞아들였다. 근동에서 일부러 찾아온 어린 선비들을 소홀히 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방에 들어서자 그들은 양산보에게 예를 갖추어 정중하게 절을 올리고 나서 각기 사는 곳이며 이름과 자를 말했다.

“우리는 창평 향교에서 동문수학하는 친구들입니다. 선비님께서 기묘사화 때 정암 대감을 모시고 오셨다는 이야기는 오래 전에 들었습니다. 진작 찾아뵙고 가르침을 받고 싶었으나 관례를 치를 때까지 기다리느라 오늘에야 뵙게 되었습니다.”

네 사람 중에서 큰 키에 어깨가 떡 벌어지고 눈이 부리부리하게 생긴 고운이라는 선비가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양산보에게 정암의 왕도정치에 대해 물었다.    

“왕도정치란 도학을 존숭하고 인심을 바르게하며 성현을 본받음으로써 지치 즉 이상정치를 일으키는 것이지. 즉 성리학을 정치와 교화의 근본으로 삼아 중국 한나라 은나라 주나라와 같은 왕도정치를 이상으로 하는 지치주의 정치를 실현하는 것이네. 지치주의란 하늘의 뜻이 실현된 이상사회를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이룩하는 것이지. 그러자면 왕을 비롯한 지배층의 마음이 바르지 않으면 안 되느니. 해서 정암 선생께서는 임금께 성현을 본받아 수양에 힘쓸 것을 강조했다네. ”

양산보는 어린 선비의 물음에 쉽고 간단하게 답해주었다.

“지치를 실현하자면 먼저 다스림의 근본인 군주의 마음부터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군주의 마음이 바르지 않으면 교화가 행해질 수 없기 때문이겠지요. 임금이 격물(格物),치지 (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의 공을 이룸으로서 마음을 밝혀 군자와 성인을 분별해야 지치주의를 실현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

고운의 옆에 앉은, 다소 왜소해 보이는 체구에 눈빛이 날카로운 선비가 말했다.

“자네 이름이 뭐라고 했지? ”

양산보는 눈빛이 예리한 선비의 말에 적이 놀라며 이름을 물었다.

“유천리 사는 유미석이라고 합니다.”
“그래, 유선비가 말한 격물치지, 아주 중요한 이야기네. 이는 대학의 도를 실천하는 여덟 가지 조목에 속한다는 것은 다 알고 있겠지? 주자는 격(格)을 이른다(至)는 뜻으로 해석하여 모든 사물의 이치를 끝까지 파고 들어가면 앎에 이른다고 했지. 이른바 성즉리설(性卽理說)을 말하지. 여기서 리(理)란 사람이 마땅히 가야할 바른길을 말하네. 따라서 판단의 기준은 모든 사물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알아야하는데 주자는 본성을 중요하게 보는 것이지. 그런가하면 왕명학은 사람의 참다운 양지(良知)를 얻기 위해서는 사람의 마음을 어둡게 하는 물욕을 물리쳐야한다고 주장했지. 이를 심즉리설(心卽理說)이라고 하지. 다시 말해서 격물치지란 모든 사물의 교유한 가치를 알고자 노력하는 것을 말하는데, 주자는 성즉리, 즉 우리의 갈 길은 사물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가치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는 주장이고 왕명학은 우리의 갈 길은 마음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는 것이야. 왕명학의 주장은 간단하고 쉬운듯하나 자칫 자의적 판단에 빠지기 쉽고, 주자의 주장은 합리적이기는 하나 모든 가치를 제대로 알아야만 하지. 결국 주자는 격물의 목적은 영원한 이치에 관한 우리의 지식을 넓히는 데 있다고 하면서 치지가 격물보다 먼저라고 했네. 지식을 강조한 것이지. 이에 반해서 왕명학은 격물이 치지보다 먼저라고 주장하였는데 도덕적 실천을 강조한 것이네. 따라서 임금이 지치주의를 실현하려면 모든 사물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것이네. 모든 일을 판단하려면 그 가치를 제대로 알아야하기 때문에 임금은 늘 공부를 게을리해서는 안 되지.”   

양산보는 길게 설명을 해주고 나서도 만족스럽지가 않았다. 기실 지치주의와 격물치지에 대해서 더 자세하게 말해주고 싶었지만 어쩐지 저어되는 바가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처음 본 어린 선비들이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선비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정암 대감께서 사약을 받으신 것은 결국 임금이 격물치지를 제대로 하지 못한 탓이라는 생각이 듭니다요. 중종 임금께서 사리판단을 제대로 하셨더라면 기묘사화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 아닙니까? ”

고운의 말에 양산보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들에게 더 이상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은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산보는 고운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참, 요즘도 선비님께서는 봉황을 기다립니까? ”

고운이 다시 물었다. 양산보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소문에는 선비님께서 기다리는 봉황은 진인이라고들 하는 데 사실입니까? ”
“진인이라니? ”

양산보는 화드득 놀란 얼굴로 진인을 입에 올린 유미석을 향해 반문했다.

“비결서에 보면 언제인가 진인이 출현하여 새로운 세상을 열게 될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해서 비기를 읽은 사람들은 이에 대비한 피난지지로서의 이상경(理想景)을 찾는다고 하지요. 혹시 선비님께서도 진인 출현에 대비하여 이곳을 피난지지로서의 이상경으로 생각하지는 않으신지요.”
“어디서 그런 헛된 소문을 들었다는 것인가. 나는 비기를 읽지도 듣지도 않았고 창암동 원림을 피난지지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네. 더욱이 새 세상을 이룩할 진인을 기다리다니. 나는 어디까지나 군자를 기다릴 뿐이네. 진인과 군자는 엄연히 다르거늘 어찌 그런 말을 함부로 입에 담는단 말인가.”

유미석의 말에 양산보는 버럭 화를 냈다.

“하오면 군자와 진인은 어떤 차이가 있는지요? ”
“군자는 인격수양과 학문연마를 통해 만들어진, 인격과 도덕을 갖춘 정암 스승과 같은 사람이고, 진인은 태어날 때부터 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참사람일세. 이를테면 석가모니 같은 분이지.”

양산보는 유미석의 물음에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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