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번째 꿈, 소쇄원의 소쇄처사> 제70화

삼강문 안쪽에 종손 고원희가 살고 있는 고택이 제봉산을 등지고 서북향으로 한갓지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문간에 큰 개가 지키고 있다가 사납게 짖어대는 바람에 한 발작도 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 집 밖에서 어슬렁대며 고택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사랑채와 안채 곳간 사당 대문으로 이루어진 고택은 마당이 넓고 텃밭도 보였다. 고택에서 제봉산으로 올라가는 늙은 소나무 숲길이 눈에 들어왔다. 문인주는 문득 소나무 숲길을 거니는 고경명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어렸을 때 모습에서부터 진사 합격에 이어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한 스무 살 때, 서 씨를 아내로 맞은 스물한 살 때, 그리고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와 19년 동안 칩거하다시피 했던 모습들이 차례로 스쳐지나갔다. 어쩌면 고경명은 이곳에 살면서 소나무 숲길을 따라 수없이 제봉산에 오르내리며 무등산을 바라보고 여러 가지 생각을 키웠을 것이다. 

그들은 한참동안 말없이 소나무 숲길을 서성이다가 내려왔다. 그리고 다시 큰길로 걸어 나와 대촌 사거리에서 광주 시내로 들어가는 시내버스를 탔다. 버스 뒷좌석에 앉은 문인주는 어깨에 메고 있던 비닐가방 속에서 <유서석록>을 꺼냈다. 포충사에 오기 전 면사무소에 찾아가 컴퓨터에서 뽑은 것이다.

< 4월20일 갑자. 맑음. 갑술년 초여름 광주목사 갈천 임 선생께서 한가한 날 빈객들과 함께 서석에 오르려하는데, 동행할 수 있겠느냐는 글월을 보내어 나를 초청했다. 나는 어른들과의 약속을 어길 수 없어 4월20일 산에 오를 행장을 갖추어 먼저 증심사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유서석록’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41세의 고경명이 74세 고령의 광주목사 임훈의 초대를 받아 무등산에 오르게 된 것이다. 그 무렵 고경명은 울산군수로 발령을 받았으나 부임하지 않고 압보촌에 돌아와, 9년째 독서와 시 짓기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진사에 합격한 다음,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여, 공조좌랑,전적,정언 등 벼슬살이를 했다. 30세 교리로 있을 때, 인순왕후 외숙 이량의 전횡을 논하는 일에 참여한 일 때문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오고 말았다. 한번 벼슬길에서 멀어지자 좀처럼 기회가 다시 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문인주는 계속 유서석록을 읽었다. 고경명은 어렸을 때부터 여러 차례 무등산에 올라 관상했노라고 썼다. 고경명은 견마잡이 하인을 재촉하여 정오가 채 못 되어 골짜기 어귀에 도착했다. 아침에 말을 타고 서둘러 압보촌을 출발, 정오 무렵에 증심사 골짜기 들머리에 도착했으니, 집에서 그곳까지는 꽤 먼 거리다. 누다리(골짜기와 골짜기를 연결하는 나무다리로 다리 위에 누각을 올렸다.) 위에 큰 나뭇가지가 덮고 수목이 울창한 골짜기 어귀에 이르자 물소리가 요란했다. 고경명은 말에서 내려 저고리를 벗고 시냇가로 내려가 차가운 물에 발을 담그고 앉아 탁족을 즐기며, 창랑가를 외우고 중국의 명악가가 지은 초은의 가락을 읊었다. 여유로운 고경명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물가에서 잠시 쉬었다가 다시 말에 오른 고경명은 해가 설핏하게 기울기 시작할 무렵에서야 증심사에 도착했다. 압보촌에서 증심사까지 꼬박 하루가 걸린 셈이다.

<취백루(翠栢褸)에 올라 난간에 기대어 잠깐 쉬면서 생각하니, 이 이름이 잣나무가 뜰 앞에 푸르다 (柏樹庭前翠)‘라는 글귀에서 따온 듯싶다. 벽 위에 권흥 등 몇 분의 시 현판이 걸려 있는데, 대개 홍무 년간 (1368-1398)에 쓴 것으로 오직 김극기의 현판만 빠졌으니 후세 사람으로서는 유감이 아닐 수 없었다.>

 고경명은 고려 명종 대의 문신 김극기의 시를 좋아했다. 그는 농민반란이 계속 일어났던 시대, 핍박받던 농민의 고통스러운 모습을 꾸밈없이 노래한 농민시의 개척자였다. 이인로는 <김거사집>의 서문에서 ‘ 김극기는 난세에 봉황 같은 인물로, 세력가들에게 빌붙지 않고 오로지 산림에 숨어 노래했으므로, 문인으로서는 이름이 높았으나 벼슬길은 더욱 막혔다’ 라고 썼다. 고경명은 김극기가 자신의 처지와 비슷하여 마음속으로 은근히 흠모해왔다. 

고경명이 증심사 취백루에서 잠시 숨을 돌리며 벽에 걸린 현판을 둘러보고 있는 사이, 주지인 조선이 나와 반갑게 맞으며 바닥을 쓸고 자리를 펴주었다. 그는 조선과 현판에 새겨진 권흥의 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너무 피곤하여 얼핏 잠이 들었다. 한식경 단잠을 자고 일어나니 타오르는 듯한 주황색 노을이 서산에 걸쳐 있고 참새 떼들이 숲속으로 날아드는 모습이 보였다. 절 옆의 대밭이 산으로 이어질 만큼 넓고 끝이 보이지 않았다. 해질 무렵 대숲으로 날아드는 새떼들을 보고 있노라니 저절로 마음이 울연해졌다. 벼슬을 그만두고 9년째 집안에 들어앉아 있는 자신의 처지가 딱하게 여겨졌던 것이다. 그는 조선 스님이 마련한 약주와 산채로 저녁을 먹으며, 소재가 증심사에 와서 했던 이야기를 들었다.

소재 서홍수(1515-1590)는 문신으로 산수시가 뛰어났는데 갑산으로 유배된 후 풀려나서 백두산을 유람하며 쓴 <유백두산기>로 유명하다. 조선 스님은 또 누다리가 있는 시냇가 바위에 최송암의 시가 새겨져 있으나 새긴 획이 엷고 이끼가 끼어 알아볼 수 없게 된 것이 안타깝다는 말을 했다. 고경명은 최송암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언젠가 송암의 <노가기>(老&#27295;記)라는 글을 읽은 적도 있다. 집 근처에 서 있던 3-4백년은 되었음직한 늙은 오동나무가 오랜 풍파에도 의연한 모습을 지녀왔는데, 어느 날 세차게 몰아친 비바람에 뿌리가 뽑혀 넘어지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의 땔나무감이 되어 흔적조차 없어진 것을 보고 안타까워하면서 인간사의 부질없음에 빗대어 쓸쓸함을 달랜 글이었다.         

<이날 저녁에 이만인과 김형이 함께 와서 유숙했다. 노승이 등불을 밝히고 향을 피워 예불을 마친 다음 숙소에 와서 공손히 앉아 말하기를, 이곳에는 옛날에 향반을 설치했다가 연루 (연꽃 모양의 물시계)로 갈아 바꾸어 시각에 따라 종을 치기 때문에 시끄러워 주무시는데 방해가 될까 염려된다고 하기에, 우리들이야 오랜만에 속세를 벗어나 잠시나마 이 좋은 곳에 머물며 고요하고 맑은 저녁에 절로 잠도 잊을 것이며, 또한 맑고 깨끗한 종소리가 듣기 싫은 것도 아니거니와, 그 소리를 들으면 오히려 깊이 깨닫는 바가 있을 것이다, 라고 했다. 세 사람이 밤늦도록 이야기하다 보니 어느새 밤은 깊은데 노승의 코 고는 소리가 천둥치는 것 같아서 더없이 우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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