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번째의 꿈, 소쇄원의 그림자> 제80화

오늘은 비번이다. 남보라색 코딱지꽃들이 군락을 지어 피어 있는 마당에 이른 봄 햇살이 뭉떵뭉떵 꽃혀 내리고 있다. 사락사락 햇빛 쏟아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문인주는 비번인 날에는 잠을 자거나 책을 읽는다. 그는 책을 읽기에는 이른 시간이라, 늦은 아침을 먹은 후 커피 잔을 들고 마루 끝에 앉아 해바라기를 즐기고 있다. 진주가 꼬리를 치고 다가와서는 문인주의 바짓가랑이를 물고 늘어지며 같이 놀자고 한다. 덩치를 보니 이제는 성개가 다 되었다. 얼핏 봐서는 잃어버린 최 선생 댁 진주와 구별하기가 어려울 만큼 닮았다. 문인주는 커피 잔을 비우고 나서 허리를 꺾어 가까이서 진주 얼굴을 마주보았다. 진주가 물고 있던 바짓가랑이를 놓더니 고개를 들어 생각에 잠긴 듯한 짙은 갈색 눈으로 주인을 쳐다본다.

문인주와 진주의 눈길이 엉켰다. 진주 너, 나한테 할 말 있어? 문인주가 진주를 향해 눈으로 물었다. 순간 진주가 꼬리를 상쇠 머리 돌리는 것처럼 뱅글뱅글 휘저으며 컹컹 짖어댔다. 고개를 끄덕이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진주가 땅바닥에 벌렁 눕더니 네발을 허우적거렸다. 주인에게 절대복종을 뜻하는 몸짓을 한 것이다. 그 때 길 쪽에서 인기척이 있는지 진주가 잽싸게 몸을 일으키며 멍멍 짖어댔다. 낯익은 사람인 모양이다. 그는 진주가 짖는 소리를 들고 낯선 사람인지 낯익은 사람인지를 구별할 수 있다. 반가워서 짖는 소리와 경계하며 짖는 소리, 배고파서 짖는 소리, 무서워서 짖는 소리가 각각 다르다. 이윽고 최 선생이 마당 안으로 들어섰다. 진주가 최 선생 가까이 쪼르르 달려가더니 반가움의 표시로 꼬리를 홰홰 흔들었다. 그러나 최 선생은 진주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는 듯 턱 끝을 세우고 문인주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최 선생이 문인주의 진주에 대해 애써 무관심을 나타낸 것은 잃어버린 자신의 진주를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리라.

“커피 한잔 마시러 왔네.”

최 선생이 마루에 걸터앉아 가느다랗게 늘인 시선을 집 앞 소나무 숲으로 던지며 말했다. 소나무 숲에서 꾀꼬리가 기분좋게 울었다. 꾀꼬리는 주변이 조용할 때만이 아름다운 목소리로 운다. 인기척이 있거나 동물들이 소란스러울 때는 꽥꽥 개구리 소리를 낸다. 문인주는 처음 이 골짜기에 왔을 때, 꾀꼬리 우는 소리를 듣고 가까이서 꾀꼬리를 보려고 한나절 동안이나 숲속을 헤맨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가 가까이 가기만하면 꾀꼬리는 울음을 뚝 그쳤다. 꾀꼬리 우는 모습을 보기 위해 오랫동안 숲속을 헤매던 끝에 마침에 꾀꼬리 둥지를 발견하고 떡갈나무 숲 속에 숨어서 지켜보았다. 둥지에는 네 마리의 새끼가 저마다 노란 주둥이를 하늘로 쳐들고 있었다. 암수 두 마리가 계속 벌레를 잡아다 아주 공평하게 새끼들을 먹이는 것을 보고 놀랐다. 잠시도 쉬지 않고 벌레를 잡아다 먹이는 동안에도 새끼들의 배설물을 깨끗이 먹어치웠다. 산에서 내려와 최 선생한테 꾀꼬리 이야기를 했다.   

 “커피 좋아하시지 않지 않아요. 국산 황차 타드릴까요? 황차는 많이 마셔도 괜찮대요. ”
문인주가 커피보트에 물을 끓이기 위해 주방으로 들어가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냐. 커피 타줘. 설탕 빼지 말고 달달하게.”
최 선생이 주방을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식전 혈당이 140이 넘은 그가 어찌된 일인지 설탕을 빼지 말라고 했다. 문인주는 아무래도 최 선생이 또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 모양이라고 짐작했다. 문인주가 커피를 타 오는 동안 최 선생은 여전히 앞산을 향해 멀리 시선을 던진 채 깊은 생각에 묶여 있는 표정이었다.
“설탕 조금만 넣었어요.”

문인주가 김과 향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커피 잔을 마루에 놓으며 최 선생의 얼굴에서 무슨 비밀이라도 탐지해내려는 듯 짯짯이 들여다보았다. 이날따라 최 선생의 표정이 깊은 우물 속처럼 음울해보였다. 또 세상 떠난 부인 생각에 잠을 못 이룬 것인지도 몰랐다.
“자네는 인생이 부질없다거나 허무하다는 생각 안 드는가? ”
최 선생이 커피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다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당연히 허무하죠. 산다는 게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건 아니지 않어요.”
“그렇지? 자네도 그렇지? 그런데 왜 이렇게 아등바등 허우적거리면서 살려고 하지? ”
최 선생은 남은 커피를 숭늉 마시듯 단숨에 꿀꺽꿀꺽 마시고 잔을 내려놓으며 큰 소리로 반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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