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번째의 꿈, 소쇄원의 그림자> 제83화

식영정이라는 정자 이름은 임억령이 지었다. 임억령은 ‘장자’ 잡편 중의 그림자를 두려워하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빗대어 다음과 같이 ‘식영정기’에서 설명했다.

<옛날에 자신의 그림자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그림자가 두려워 햇빛 아래서 달리며 이를 뿌리치고자 하였으나, 빨리 달릴수록 그림자도 재빨리 따라왔다. 그러다가 나무 그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보이지 않았다. (중략) 내가 지난날 조정에서 높은 벼슬을 하였지만 지금은 죽장망혜로 산수간을 소요하며 지내는 것 역시 그 사이에 조물주의 희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찌 이를 기뻐하고 슬퍼하겠는가. 흐름을 만나면 가고 구덩이에 이르면 멈추게 되니, 가고 머무름은 사람의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임천에서 조물주와 더불어 느닐게 되면 자연히 그림자도 없어지고, 남들이 손가락질도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즉 이 정자를 식영이라 부르는 게 어떠하겠는가. >  
 
그림자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남기게 되는 흔적과 같은 것으로, 욕심을 버리고 번잡한 현실을 떠나 자연과 더불어 살면 자연히 사라지게 된다는 것을 문인주 자신은 깊이 깨닫고 있다. 어쩌면 ‘식영’ 은 그 자신이 곱씹으며 살아갈 삶의 좌표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가 시궁창 속 같은 정치판의 현실에서 허우적거리고 살다가 무등산 뒷자락으로 들어오면서부터 마음의 평화를 누리게 된 것도 식영이 아니겠는가 싶었다. 그러나 아직 그는 헛된 욕망의 그림자를 충분히 털어내지는 못하고 있다.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노송들로 에두른 전각 앞에 오르자 바람도 옛 가락으로 잔조롭게 숨을 쉬며 불어오는 듯싶었다. 문인주는 발부리 아래 푸른 글씨가 되어 흐르는 자미탄 방향으로 걸음을 옮겨 무등산 쪽을 보았다. 부신 햇살이 찔러오는 나뭇가지들 사이로 갈매 빛 무등산이 보였다. 그러나 환벽당은 숲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고경명은 유서석록에서 '식영정에서 남쪽을 바라보니 정자 하나가 날 듯이 서 있으며‘ 라고 썼는데, 문인주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문인주는 구두를 벗고 정자로 올라서서 옛 시인들이 혼을 토해내 쓴 식영정20영을 살펴보았다. 정철의 ‘성산별곡’ 자양분이 되었다는 식영정20영이 서석산의 한가로운 구름 (瑞石閑雲) 등 스무 개의 풍광으로 그림처럼 펼쳐졌다. 스무 개의 아름다운 풍광 중에서 서석의 한가로운 구름과 창계의 흰 물결만이 예와 다름없고, 난간에서 물고기 보기, 송담에 떠 있는 배, 학동의 저녁 연기, 평교의 피리소리, 단교의 돌아가는 스님 등은 이제 다시 볼 수 없을 것만 같다. 노자암은 물에 잠기었고 자미탄 자리에는 유지비가 쓸쓸하다.      

다시 돌계단을 밟고 내려온 문인주는 발걸음을 서하당으로 향하다가 부용정 앞에 멈추어 섰다. 김성원의 ‘부용당’ 에 ‘연꽃 줄기는 한 길이 넘고 못의 깊이는 배꼽을 차네’라는 대목 그대로, 물의 깊이는 가늠할 수 없으나 부용정 연못에는 수련과 어리연이 파랗게 수면을 덮고 있었다. 초여름의 푸른 그늘 아래 고즈넉하게 자리 잡은 서하당 문은 활짝 열려있었다. 석천 임억령은 양 씨 부인과 이곳에 머물면서 딸 둘을 낳고 살다가, 세상을 하직할 무렵 고향으로 돌아갔다. 사방이 너무 조용해서 댓돌에 올라 큰 소리로 선생님 하고 부르면 석천이 누구 왔소? 하며 걸어 나올 것만 같았다. 서하당 뒤뜰로 돌아가 보았으나 대나무와 잡목들만 우거져 있고 화초 한 그루 없이 음산했다. 문인주는 서하당 앞 은행나무 그늘 밑  돌 의자에 앉아 ‘성산별곡’의 한 대목을 나지막한 목소리로 읊어보았다.
 
어떤 지날 손이 성산에 머물면서
서하당 식영정 주인아 내 말 듣소
인생세간에 좋은 일 많건마는
어찌 한 강산을 갈수록 나이여겨
적막산중에 들어 아니 나시는가

문인주는 다시 광주댐이 만들어지면서 흐름이 바뀐 창계를 가로지른 충효교를 건넜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 김윤제가 환벽당을 지으면서 창계천 여울을 사이에 두고 무지개다리를 놓아 서하당과 환벽당을 오갔다고 한다. 옛 독목교는 흔적도 없고 단단한 시멘트 다리가 담양과 광주를 이어주고 있다. 다리를 건너면 광주 땅이다. 다리를 건너 곧장 가면 긴윤제와 김성원, 김성원의 조카 김덕령이 태어난 석저촌(지금의 충효리)에 이르고, 왼쪽으로 물을 따라 휘어들면 환벽당이다. 아, 눈에 먼저 들어온 것은 늙은 소나무들과 창계천의 펀펀하고 넓은 바위와 물이 넉넉하게 고인 웅덩이다. 정철의 ‘성산별곡’을 지으면서 ‘조대쌍송’(釣臺雙松)이라고 한 곳이 바로 이곳이구나. 창계의 이 널따란 바위에서 김윤제와 정철이 운명적으로 만났다. 16세의 정철은 그 때 유배에서 풀려난 아버지를 따라 창평에 내려와 살고 있었다.

무더운 여름날 그는 순천에 있는 형을 만나러 가다가, 조대 용소에서 멱을 감고 있었다. 그 때 환벽당에서 낮잠을 자고 있던 김윤제는 꿈에 조대에서 꿈틀거리는 한 마리의 용을 보았다. 이상하게 생각한 김윤제가 창계로 내려가 물속에 있는 귀골의 소년을 발견했다. 김윤제는 그를 환벽당으로 데리고 올라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그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제자로 삼았다. 나이 50세가 된 김윤제는 나주목사를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만년에 머무를 환벽당을 지은 그해였다. 송강은 이곳에서 27세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갈 때까지 11년동안 환벽당에 유숙하면서 머물렀다. 그는 김윤제 문하에 들었고 임억령 고경명 김인후 송순 등에서도 학문을 익혔다. 김윤제는 그의 외손녀를 청절에게 시집보내기도 했으니, 청철에게 김윤제는 스승이자 외조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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