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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담양천년 특집(담양담양사람들)/죽녹원을 지키는 장인들(2)
  • 강성오 문화전문기자
  • 승인 2018.11.20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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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녹원 시가문화촌 명옥헌 주인 소천 채태원
대나무 붓 만들기와 서예체험 통해 선비골 담양 홍보

▲소천 채태원 선생
▲죽녹원 시가문화촌 '명옥헌'

“동서 때문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지요.”

죽녹원 시가문화촌 명옥헌에서 관광객들에게 대나무 붓 만들기와 서예 체험을 통해 담양이 대나무골 이자 수많은 선비를 배출한 문향(文鄕)의 고장임을 알리고 있는 소천 채태원 선생을 만나보았다.

소천 채태원 명장(76)은 담양 창평면 오강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초등학교를 고향에서 졸업하고 광주에서 터를 잡았다. 그의 할아버지가 붓을 만들고 서예를 하는 걸 보고 자랐기 때문에 붓과 인연이 깊었다. 하지만 붓을 제작하기보다는 직장 생활을 먼저 시작했다. 붓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인 모양인지 결혼했는데 동서가 붓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틈틈이 동서와 붓을 주제로 대화했다.

“동서가 직장에 다니는 것보다 나을 것이라며 권유했습니다. 동서 때문에 뛰어들었지요.”
당시 붓은 학생들에게나 가정에서는 필수품이나 마찬가지였다. 집집마다 붓과 벼루세트가 있고 학교에서도 서예를 가르쳤으니 붓의 수요가 엄청났다. 깊이 따져보지 않아도 직장보다 나을 듯했다. 게다가 할아버지가 붓을 만드는 것을 보고 자란 탓에 붓 만들기에 대한 두려움도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과감히 직장을 접고 붓 제작에 뛰어들었다. 당시 나이 스물다섯이었다.

스승이자 동서인 대하 김복동은 광주 백운동에서 3대째 붓의 명맥을 유지해오고 있었다. 후에 광주시 무형문화재 4호로 지정될 정도로 거목이었다.
대하 선생은 직업에 대한 자긍심도 대단했다. 붓의 재료로 흔히 염소 털이 쓰이는데 대하는 겨울에서 봄이 되기 전까지 생산하는 염소 털만을 고집했다. 그렇게 엄선된 재료로 소천을 엄격하게 가르쳤다. 털이 하나라도 흐트러지면 다시 만들라고 했다. 그리고 붓의 4덕이라 불리는 ‘침제원건’을 귀가 닳도록 강조했다. 끝이 뾰족해야 하고, 가지런해야 하며, 털의 모둠이 완전한 원을 이루어야 하고, 붓털에 힘이 있어 바로바로 서야만 붓으로서 가치가 있다는 것이랬다.

▲서예체험

“너무 일찍 두각을 나타낸 것이 문제였습니다.”

소천은 1973년 제1회 인간문화재 공예작품전에서 입선했다. 그의 손재주가 처음으로 인정을 받은 것이었다. 그리고 다음 해 중앙일보에 소개되었다. 그 기사 때문에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전국에서 주문이 쏟아졌다. 어떤 이는 휴지로 사용하려고 신문지를 들고 화장실에 갔는데 화장실에서 기사를 보고 알았다며 주문하기도 했다. 소천은 밀려든 주문 때문에 하루도 빠짐없이 우체국을 드나들었다. 붓을 사용한 사람들의 호평이 잇따랐고 결국 박정희 대통령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소정 정상애 서예가에게 붓글씨를 사사 받고 있었다. 대통령이 붓글씨를 배우니, 대통령에게 잘 보이려고 정치인들이 소천 붓을 구해 선물하려고 안달이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실세들이 그를 극진히 예우했다. 실세들이 극진히 예우하는데 이를 지켜본 사람들이야 오죽하겠는가. 소천과 인연을 맺어 대통령에게 자신을 알리려는 사람들이 줄기차게 접근했다. 소천은 그들과 어울리느라 씀씀이가 커질 수밖에 없었고 돈을 모으기보다는 그들과 교류하느라 탕진하다시피 했다. 30대 초반이라 세상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열심히 붓만 만들어 팔았다면 큰돈을 모을 수 있었는데, 기회를 놓친 것이었다.

육영수 여사 또한 서예를 배웠다. 영부인이 서예를 배우자 고위급 인사와 회장 부인들 또한 서예를 배웠다. 서예는 마음가짐이 안정되고 정신집중에 효과가 좋은데, 그보다는 육영수 여사와 인연을 맺으려는 기회로 삼으려는 부류가 많았다. 소천은 육영수 여사가 다니는 서예 학원에 한 달에 한 번씩 붓을 공급했다. 그가 붓을 가지고 학원에 갈 때는 신문지에 둘둘 말아 다섯 개 정도만 가지고 올라갔다. 수십 필을 가져가도 될 터인데 장사 수완이 없어 몇 개만 들고 올라간 것이었다. 양손에 가득 붓을 가지고 일반 필방에 납품해도 40만 원도 되지 않았는데 그분들은 몇 배의 돈을 지불했다. 서울 한 번 다녀오면 집을 한 채 살 정도였다.

▲소천 선생의 붓

붓이 우수하다는 것을 알고 그분들이 도와줄 일이 없는지 묻곤 했다. 그때마다 소천은 특별히 도와줄 일이 없다고 했다. 돌이켜보니 백운동에 붓 단지라도 하나 조성해달라고 할 걸 하는 후회가 솟구쳤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육영수 여사가 작고한 후였고, 영부인이 서예 학원에 다니지 않으니 귀부인들도 서예를 그만 두어 그분들을 볼 기회도 없었다.

또 한 번의 목돈을 벌 기회가 있었다. 전두환 정권 시절, 비서실장이 소천에게 붓 100세트를 주문했다. 그런데 아웅산 사태로 비서실장이 타계한 바람에 납품처가 사라져버렸다. 돈을 버는 것보다 열심히 붓 만드는데 전력을 기울이라는 하늘의 계시 같았다.
한번은 道무형문화재로 지정받으려고 신청했다. 전석홍 도지사 시절이었다. 당시는 대가를 바라는 공직자들이 종종 있었는데, 소천을 상대한 담당자도 그런 부류 중 한 명 이었다. 그는 구체적으로 1년 치 수령액을 달라고 아예 노골적으로 요구했다. 소천은 그런 방법으로 문화재로 선정되고 싶지 않아 단호히 거절했다. 그런 일을 겪고 나서는 정말로 붓 만드는 일에만 진력했다.

“고향에서 여생을 보낼 것.”

소천은 수상 경력이 화려하다. 제1회 인간문화재 공예작품전 입선을 시작으로, 제2회, 제3회 인간문화재 공예작품전 입선, 제5회 전승공예대전 입선, 제 10회, 제11회, 제12회 전국관광민예전 전남우수상, 전국 입선, 특선, 제6회, 제7회, 제8회 전승공예대전 입선, 제1회 88올림픽 공예품 경진대회 장려상, 제 22회, 제23회 전남공예대전 우수상, 최우수상 수상 등 이후로도 수 없이 많은 상을 수상했다. 뿐만 아니라 언론에도 자주 소개되었다. KBS, MBC는 물론 각종 일간지와 주간지 및 다양한 언론에 소개되었다.

소천 붓을 의제 허백련 선생이 극찬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내로라하는 서예 대가인 송곡 안기동, 소암 현중화, 장전 하남호, 강암 송성용, 담헌 전명옥, 학정 이돈홍 선생도 소천 붓을 애용했다. 그런 대가들과 붓 때문에 인연이 되어 취득한 작품을 담양군에 기증하여 특별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소천은 기증을 하고 나니 오히려 홀가분하다고 했다. 원래 자리로 돌려보낸 느낌이라는 것이다.

백운동에서 살았던 그가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을 위해 나름의 역할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는 주말이면 죽녹원 명옥헌에서 관광객들에게 소천 붓을 소개하고 있다. 지금도 주문이 밀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지만. 죽녹원에 나오는 것이 재충전하는 시간이기도 하고, 담양을 알리는 일이라 보람도 느낀다. 그의 호 소천은 작은 샘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결코 작은 호가 아니다. 호를 지어준 분은 서예의 대가인 일중 김충현 선생이다. 작은 샘물이 흐르고 흘러 태평양까지 도달한다는 의미를 담았다고 했다. 그의 호처럼 소천은 그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 강성오 문화전문기자
 

 

강성오 문화전문기자  webmaster@d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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