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번째의 꿈, 소쇄원의 그림자> 제88화

양산보가 한양에서 내려와 창암촌에 은거한 지도 33년이 되었다. 혈기왕성하고 꿈 많던 그가 세상과 담을 쌓고 산수와 친하게 지내기 시작한 몇 년 동안은 외로움과 답답함을 견디기가 힘들었지만, 별서를 짓고 찾아오는 선비들과 어울리며 은일자적하다 보니, 세월이 빠르게 흐르는 것 같았다. 그동안 그는 몇 차례 벼슬길에 나아갈 기회가 있었으나 출사에 욕심 부리지 않고 한사코 몸을 사렸다.  

이 무렵 을사사화가 일어나 많은 사림들이 또 화를 입었다. 문정왕후의 세도가 시작되자 성수침,성운,이황,서경덕,조식 등 많은 사람들이 벼슬길에서 물러나 낙향했다. 호남에서도 김인후를 비롯하여 안축, 임억령이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소쇄원을 오가며 양산보와 가깝게 교유했던 사람들은 을사사화 이후 거의 벼슬을 그만두었다. 김인후 역시 벼슬을 그만두고 순창 점암촌에 훈몽재(訓夢齋)라는 초당을 짓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이 때 훈몽재에서 공부한 선비로 정철, 양자징, 조희문, 기효간, 변성온 등이 있는데, 이들 중에서 양자징은 훈몽재에서 오랫동안 장인인 스승을 모시고 깊은 가르침을 받았다. 김인후는 점암촌에 있을 때, 사위 양자징 편에 <소쇄원 형에게 드림>이라는 시를 양산보에게 보내면서, 매화꽃 필 때 소쇄원에 들러도 좋을지 묻고 있었다.

송순은 그동안 전라도관찰사와 대사헌, 이조참판을 지내다가 서천으로 유배를 당했고 해배 후 서산부사로 있다가 고향에 내려왔다. 임억령은 해남과 창평, 강진을 왕래하다가, 성산동의 서하당에 머물고 있었다. 김윤제는 나주 목사 등 15개 고을의 수령을 지내고 고향에 돌아와 증암천 언덕에 환벽당(環碧堂)을 지었다. 그는 증암천에 홍교를 놓고 버선발로 걸어다니다가 황금다리를 만들었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이름난 부자가 되었다. 유희춘은 함경도 종성에서 19년 째 유배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의 부인 송덕봉이 종성까지 유배길 남편을 따라 가다가 마천령을 넘으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동해바다 끝도 없이 푸른 거울이 되었구나
     만리 길을 부인이 어인일로 따라왔을꼬
     지아비 따르는 일은 막중하고 내 일신은 가벼워라    

이른 초여름 소쇄원에 푸른빛 햇살이 가득 고였다. 신록이 우거져 사방이 청록색으로 꽉 찼다. 햇살도, 바람도, 물소리와 새소리마저도 푸르다. 양산보는 제월당 마루에 한가하게 걸터앉아 광풍각 모퉁이에 피어있는 철쭉꽃에 오랫동안 눈길이 멈추었다. 철쭉이 지고 나면 곧 오동꽃이 피고 연꽃과 배롱꽃이 이어서 피리라. 그는 아직도 해마다 여름이면 배롱꽃 피기를 기다렸다. 배롱꽃을 볼 때마다 세상 떠난 지 오래된 부인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르곤 했다. 그는 철쭉꽃에서 시선을 거두어 오랫동안 뜰아래 배롱나무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때 문인주가 조심스럽게 양산보 옆으로 다가갔다.

“처사님, 이 배롱나무를 석저촌에서 옮겨 심은 지도 스무 해가 넘었지요? ”
“올해로 꼭 스물다섯 해가 되었소. 소쇄원에 와서 해마다 스물다섯 번 고운 꽃을 피웠지.”
“배롱나무꽃은 짧은 만남과 긴 이별을 뜻하는 꽃이라고 한다지요? ”
“글세요. 무더운 여름 한철 이 꽃을 볼 수 있어 다행이라오. 참 오늘은 배롱나무꽃을 보니 매죽헌 성삼문 선생의 시가 생각납니다. / 지난 저녁에 꽃 한 송이 떨어지고/ 오늘 아침에 한 송이 피어나/ 서로 일백 날을 바라보니/ 너를 대하여 기분 좋게 한잔 하리/  ”  

양산보는 성삼문의 시를 읊은 다음 잠시 무연히 앉아 있었다.

“참, 처사님께 꼭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처사님이 소쇄원에 만들고자 하셨던 이상세계란 어떤 것인지 궁금합니다. ”

문인주는 오래 전부터 양산보에게 꼭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었는데 오늘이 좋은 기회라 싶어 염치불구하고 뚜벅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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