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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뉴스 창간기념 기획연재(소설)/소쇄원에서 꿈을 꾸다(13)문순태 작가

<두 번째 꿈, 봉황을 기다리다>

 

무등산 앞에서 서로 손을 붙잡았는데
관을 실은 소달구지만 바삐 고향으로 가는구나
훗날 저세상에서 다시 서로 만나더라도
인간사 부질없는 시비일랑 더 이상 논하지 말세나

 

박상은 조광조가 유배를 당해 화순으로 내려올 때 무등산 앞, 광주 분수원에서 만나 손을 붙잡고 슬픔을 나눈 적이 있었다. 그 무렵 박상은 다행히 모친상을 당해 광주에 내려와 있었기에 기묘사화의 화를 면할 수가 있었다. 박상은 조광조와 가깝게 지냈다. 그가 담양부사로 있을 때 순창군수 김정 등과 함께 폐위된 중종비 신 씨를 복위시켜야한다는 상소를 올려, 조정이 발칵 뒤집혔고 중죄에 처해질 분위기였는데, 조광조의 간언으로 남평으로 귀양가는 것으로 끝이 났었다.

“언진 자네가 보고 싶어서 오늘은 스승님한테 특별히 허락을 받고 왔다네.”

그러면서 김윤제는 한사코 바깥바람을 쐬러 나가자고 했다. 양산보는 김윤제의 간청을 뿌리치지 못해 오랜만에 밖으로 나왔다. 김윤제는 양산보와 함께 창암촌에서 담배 한 대 참도 안 되는 제비내(燕川) 건너 산음동 산기슭 독수정 (獨守亭)으로 올라갔다. 독수정 올라가는 길 주변에 진달래가 무더기로 피어 있었다. 바람이 건듯 불자 솔바람이 일면서 산기슭에 향기가 은은하게 퍼졌다. 두 사람은 정자의 주인이 썼다는 <독수정원운>(獨守亭原韻)이라는 글을 읽기 위해 몇 번인가 이곳에 와 본 적이 있었다. 독수정은 고려말 북도안무사 겸 병부상서를 지낸 서은 전신민이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무참히 살해당하고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 72현과 함께 두 나라를 섬길 수 없다 하여 이곳에 내려와 정자를 짓고 은둔한 곳이다. 그들이 소나무가 울창한 가파른 오솔길을 올라가니 독수정이 무등산 북벽에 기댄 채 덩그렇게 돌아앉아 있었다. 늙은 소나무와 대나무로 에두른 독수정은 찾아와 주는 사람이 없어 쓸쓸하고 고즈넉해보였다.

“홀로 지킨다의 독수라는 두 글자에 정자 주인인 서은 전신민 장군의 비장함이 서려있지 않은가? ”

김윤제가 정자의 편액을 쳐다보며 말했다. 양산보는 독수라는 말이 이백의 시 이제시하인(夷齊是何人)의 독수서산아(獨守西山餓)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임을 알고 있었다. 은나라 말에 주나라의 록을 먹지 않겠다고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으며 절조를 지켰던 백이 숙제의 고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양산보는 전신민이 심었다는 후원의 소나무며 자미화 등 원림을 한 바퀴 둘러보고 나서 신발을 벗고 정자로 올라가서 현판의 ‘독수정원운’을 소리내어 읊었다.

 

세상일이 막막하여 생각만 많아지는데
어느 깊은 숲속에 늙은 이내몸 기댈까
천리 밖 강호에서 백발이 되고 보니
한 세상 인생살이 슬프고 처량하다

 

왕손을 기다린 방초는 봄 가는 것을 한탄하고
임금을 찾는 꽃가지는 달빛에 눈물짓네
바로 여기 이곳 청산에 뼈를 묻고
장차 홀로 지킬 것을 맹세하고 집을 지었네

 

양산보는 이 시에서 두 나라를 섬길 수 없다 하고 속세의 영욕으로부터 벗어나, 깊고 그윽한 청산에 들어와 정자를 짓고 은거한 전신민의 충정에 감동하여 머리를 숙였다. 그는 지금 자신이 마치 전신민의 처지와 같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촌이 새삼스럽게 오늘 나를 여기로 데려온 연유가 뭔가? ”

양산보는 눈을 들어 먼 시선으로 성산을 바라보며 넌지시 물었다.

“다른 뜻은 없네. 전신민은 고려에 충성을 다하고 늙어서 여기 내려와 은거했으니 여한이 없었겠지. 허나 언진은 이제 겨우 열여덟이 아닌가. 열여덟에 뜻 한번 펼쳐보지 못하고 절망에 빠져 세상과 담을 쌓고 산다는 것은 군자답지 않다고 생각하네. 스승이 억울하게 사사를 당했으니,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더욱 분발하여 세상으로 나가는 것이 마땅치 않은가. 이러지 말고 나랑 같이 과거준비를 해보는 것이 어떤가.”

김윤제가 정자 마루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양산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동안 우두커니 성산만 바라보았다. 산 위로 구름 한 무더기가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구름 위에 스승이 도포자락 펄럭이고 서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어느덧 그의 마음도 구름이 되어 스승에게로 흘렀다.

잠시 후 두 사람은 독수정에서 내려왔다. 창암촌까지 걸어오는 동안 양산보는 깊은 생각에 잠긴 채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창암촌 앞 지석천에 당도했을 때도 양산보는 다음에 보자면서 혼자 발걸음을 바삐 서둘러 수박등을 향해 언덕길을 올라가버렸다. 김윤제는 혼자 우두커니 서서 측은한 눈빛으로 총총히 사라지는 양산보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예전 같으면 양산보 쪽에서 마땅히 집으로 같이 가자고 친구를 이끌었을 터인데, 이상하게 그날은 그의 태도가 눈에 띄게 냉랭했다. 절망과 무기력과 자학의 늪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여 마음이 아렸다.

김윤제와 헤어진 양산보는 마을로 들어서다 말고 걸음을 멈추고 개울 쪽을 내려다보았다. 김윤제는 보이지 않았다. 그 때서야 그는 오랜만에 만난 김윤제와 너무 아쉽게 헤어진 것을 알아차리고 나서 후회했다. 독수정에서부터 그는 줄곧 전신민이 세상과 모든 인연을 끊고 이곳 산음동에 내려와 산 속에서 살아온 모습을 상상하느라 김윤제를 의식하지 못했다. 양산보는 아차, 하고 그 때서야 몸을 돌려세우고 다급하게 사촌, 사촌 하고 목소리를 높여 친구를 불러보았다. 대답이 없자 개울 쪽으로 서둘러 내려갔다. 김윤제는 이미 증암천을 건너 석저촌으로 연결된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양산보는 증암천을 건너 석저촌을 향해 뛰었다. 사촌을 그대로 보내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다. 솔숲 모퉁이를 휘돌아 늙은 소나무 가까이 이르러서야 양산보의 목소리를 들은 김윤제가 얼핏 뒤를 돌아보더니 걸음을 멈추고 서서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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