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뉴스 기획연재Ⅱ(소설)/대 바람소리(7화)

소설/대 바람 소리(7화/끝)

어머니는 가까운 개인병원에 도착해서야 눈물을 멈췄다. 젊고 잘생긴 의사가 어디가 아프냐고 물었지만 오동례 여사는 아픈 곳을 말하지 않았다. 의사는 대충 진찰을 해보고 나서는 별 이상이 없다면서, 사흘 정도 입원을 해서 몇 가지 검사를 해봐야겠다고 했다. 오동례 여사는 한사코 집에 돌아가겠다고 한 것을 정애가 억지를 쓰다시피 하여 입원을 시켰다.

병원에 입원한 오동례 여사는 환자복으로 갈아입지도 않고 침대에 누워있지도 않았다. 침대 모서리에 대나무처럼 서서 넋이 나간 듯 창밖만 바라보았다. 유리창 문에서 콘크리트 건물 사이로, 멀리 푸른 대숲이 보였다. 그녀는 오랫동안 대숲으로부터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대나무 숲 속 어딘가에 노랑점퍼가 앉아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눈이 시리도록 대숲을 바라보고 있자니 다시 울먹울먹 눈물이 솟구치려고 했다. 그 때 간호사가 들어와서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초음파검사를 받아야한다고 했으나 못들은 척했다. 간호사가 그녀를 붙잡고는 억지로 투피스를 벗기려고 하자, 사금파리 깨지는 목소리로 소리를 내질렀다. 놀란 간호사가 주춤 물러섰다. 환자복으로 갈아입힐 것을 포기한 듯 병실에서 나갔다.

오동례 여사는 창 옆에 바짝 붙어선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점심도 먹지 않고 대나무처럼 꼿꼿하게 서 있기 만했다. 잔뜩 화가 난 것도 같고 또 어찌 보면 자신을 추스를 수 없을 만큼 깊은 슬픔에 잠겨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녀 자신도 그 즈음 자신의 심사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잘못 살아온 자신에 화가 날 정도로 슬프고 모든 것이 허무하게만 느껴졌다. 이대로 죽기에는 너무 억울할 것 같았다. 인생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단 하루만이라도 죽도록 누구인가를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살고 싶었다. 오직 대나무처럼 변함없이 푸른 사랑을 위해서만 살아가고 싶었다. 남편에게 구박이나 받고 남자 때문에 모멸을 느끼지 않으며 꼿꼿하게 살고 싶었다. 자식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희생하고 싶지도 않았다.

오동례 여사는 해가 설핏하게 기울고 정애가 공방에서 돌아와서야 환자복으로 갈아입었다. 더 이상 창밖을 바라보고 서 있을 기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환자복으로 갈아입은 그녀는 침대에 눕더니 이내 스르르 잠들고 말았다. 날이 희붐하게 밝아오자 잠에서 깬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우두커니 앉아서, 보조 침대에서 몸을 웅크리고 불안하게 잠들어 있는 정애를 내려다보았다. 잠든 정애의 모습이 왜소하고 측은해 보였지만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했다. 이혼 후, 자식들마저 미국으로 보내고 외롭게 살고 있는 딸이 애틋하면서도 당당해 보였다. 대학원을 졸업하던 날 정애는 사랑하는 사이로, 결혼할 남자라면서 소개시켜주었다. 대학병원 레지던트에다 영화배우처럼 잘생긴 청년이었다. 오동례 여사는 남자 집안이 부자인데다가 너무 잘 생긴 게 마음에 걸렸다. 돈 많고 잘 생긴 남자치고 여자관계가 복잡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선뜻 결혼을 승낙해주고 싶지가 않아 망설였다. 딸이 평범한 남자와 결혼해서 평범한 가정을 이루고 살기를 바랐다. 정애는 죽어도 그 남자와 헤어질 수 없다고 했고 결국 그해 가을에 결혼을 했다. 오동례 여사가 우려했던 대로 사위는 끝내 외도를 했고 딸은 배신의 상처를 안은 채 이혼을 하고 말았다. 신뢰와 사랑이 컸던 만큼 배신의 상처도 오래갔다. 한 때 오동례 여사는 이혼 한 정애가 너무 불쌍하고 안쓰러워 속이 편치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니 배신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딸이 조금은 부럽기도 했다. 사랑의 상처를 갖고 있는 본인은 비록 고통스럽겠지만, 바라보는 사람의 눈에는 사랑의 상처가 아름다울 수도 있기 때문일까. 그 상처는 죽을 때까지 아물지 않을 것 아닌가. 오동례 여사에게는 그런 상처마저도 부러운 것이다.

오동례 여사는 딸이 깨지 않게 조심하면서 환자복을 벗고 원피스로 갈아입었다. 살금살금 병원을 빠져나와 거리에 서자, 상큼한 새벽공기가 온몸을 휘감아왔다. 잠을 잘 자서 그런지 설레도록 기분이 좋았다. 그녀는 곧장 집으로 돌아와 세수를 한 다음 딸의 방 화장대 앞에 앉아 서둘러 화장을 했다. 이날은 파운데이션을 주름이 있는 곳에만 얇게 바르고 눈썹도 아이세도우 봉에 짙은 갈색을 묻혀 언월도처럼 휘움하게 모양을 잡은 다음에 연필로 가볍게 그렸다. 화장을 끝내고 밖으로 나오자 어느덧 햇살이 퍼지고 있었다. 그녀는 행여 정애와 마주칠까봐 서둘러 집을 나섰다. 빠른 걸음으로 골목을 빠져나와 큰 길을 건넜다. 천변시장 쪽으로 걸어가는데 무엇인가 바람처럼 희끗 눈앞을 스치는 게 있었다. 손등으로 눈을 비비고 보니, 천변 길로 노랑점퍼에 쥐색바지 차림의 남자가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아주 느리게 걸어가는 모습이 가물가물 보였다.

오동례 여사는 있는 힘을 다해 숨이 턱에 차도록 천변 길을 향해 뛰어갔다. 그러나 모퉁이를 꺾어 돌아보니 아무도 보이지 않고 휑한 도로에 회오리바람만 흙먼지를 부옇게 허공으로 말아 올렸다. 그녀는 멈추지 않고 천변 길을 계속 뛰었다. 대 바람소리가 쏴쏴쏴 파도처럼 가슴 속으로 밀려왔다. 노랑점퍼가 관방제 벤치에 앉아서 청청한 대숲을 바라보고 있을 것만 같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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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소설은 담양 죽녹원과 관방제를 무대로 쓴 작품으로, 2006년 ‘문학사상’에 발표한 것을 작가의 양해를 얻어 재수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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