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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뉴스 창간기념 기획연재(소설)/소쇄원에서 꿈을 꾸다(17)

“내게 정암 스승님은 하늘과 같은 분이요. 그런 분과 이 년의 인연은 아주 긴 편이지요. 그 이 년 동안에 나는 평생을 공부해도 얻지 못할 것을 깨우쳤소. 그리고 내 그릇이 작은 종지라면 스승님의 도량은 함지박만 하답니다. 그런 스승님의 큰 도량과 힘으로도 뜻을 세우고도 관철시키지 못한 일을 내가 어찌 흉내인들 낼 수 있겠소. 더욱이 지금이 어떤 세상이오? 지금은 척신들의 세상이 아니오? 간악한 척신들이 임금을 속이고 온갖 나쁜 짓을 자행하는 세상이거늘, 나 같은 시골 선비가 출사를 한들 무엇을 바꿀 수 있겠소. ”

양산보의 목소리가 흥분으로 떨렸다. 양산보의 말대로 기묘사화 이후에는 김안로 등 척신들이 집권을 했다. 일각에서 기묘사화 연루자들에 대한 소통 문제가 거론되기는 했으나 척신 세력의 반발에 부딪혀 진척이 없었다.

“선비님, 그래도 세상과 담을 쌓고 이런 깊숙한 곳에 은거하시는 것은 도피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새 세상을 만들자면 세상 속으로 뛰어 들어가서 목숨을 걸고 불의와 싸우는 것이 진정 선비의 도리가 아닐까요? 정암 스승께서도 그것을 원하지 않을까요? ”문인주는 각오를 단단히 하고 다시 물었다. 양산보는 뚫어지게 문인주를 쏘아보고 나서 눈을 감아버렸다.

“혼자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소. 사림들 중에 지금 누가 있소? 기묘 사림 중에서 사형이나 유배를 면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낙향을 했소. 김안국, 이자, 송명창, 김정국,이연경,김대유, 박수량,신변,성세창,최산두 등은 낙향을 하지 않았소. 호남사림만 해도 우리 학포 당숙을 비롯하여 박상, 고운, 유성춘, 임억령 같은 분들도 낙향하여 조용히 시골에 처박혀 있지 않소.”
“그렇다면 사림파가 다시 득세한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그 때는 출사를 하시겠는지요? ” 
“김안로 대감과 문정왕후가 살아 있는 한 사림파가 득세할 리가 없소.”
“끝까지 세상과는 등을 지고 이렇듯 한가하게 오지도 않을 봉황이나 기다리며 숨어 사시겠다는 것입니까? ”
“이렇게 사는 것을 왜 숨어산다고 하시오. 나는 숨어사는 것이 아니오. 내가 무엇이 무서워서 숨어산다는 말이오. 나는 주희 운곡 노인의 삶을 동경하고 있소.”
“그렇다면 여기서 문필로 평생을 보내시겠다는 것입니까? ”
“주자께서는 유학자이지 문인이 아니지요. 내 스승 또한 문인이 아니지 않소. 나는 문인이 되고 싶지는 않소, ”
“주자는 열여덟 살에 대과에 급제하여 주부 벼슬을 하면서 조세나 감찰업무를 개혁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부를 그만 둔 후로도 황제에게 상소를 통해 계속해서 정치적 견해를 밝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주자는 직간접적으로 현실정치에 참여를 했다고 할 수 있기에, 처사님과는 입장이 다르지 않습니까? ”
“그것은 두 나라의 사정이 다르기 때문이오. 기묘년의 일이 없었더라면 나도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가기는 했겠지만, 어떤 사정이 생겨 낙향한 후 유학에 전념하게 되었을지도 모르지요. 내 성격에 결국은 권력의 부침에 휘둘리지 못하고 벼슬을 그만두었을 것이오.”
“참, 분명히 알고 싶은 것이 있는데, 제주양씨 족보에 보면 선비님께서는 기묘년 봄에 현량과에 합격하였으나 나이가 적고 수가 너무 많아서 탈락되었다고 되어 있는데, 그것이 사실인지요? ”
“전 해 유월부터 현량과 천거가 시작되어 그 해 섣달까지 예조에 일백 이십 명에 이르렀지요. 예조에서 이 중에서 마흔 명을 걸러 의정부에 보내졌고, 의정부에서 기묘년 사월에 최종 스물아홉 명을 선발했습니다. 예조에 천거된 것은 사실이나 마지막에 탈락되었지요. 허나 열일곱 나이에 천거된 것만으로도 지나친 광영이지요. 천거된 사람들 중에서 나를 제외한 최연소자 나이가 스물다섯 살이었으니까. 최종 선발된 사람들은 모두 정암 스승님의 제자들이거나 척당들로 절반이 홍문관에 임명되었지요.”

 양산보는 말을 마치고 천천히 일어섰다. 어느덧 석저촌 하늘 끝으로 해가 설핏하게 기울기 시작했다. 햇살이 쇠잔해지자 대숲 쪽에서 제법 소슬한 바람이 건듯 불어왔다. 오랫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 계곡의 물소리도 낮아지자, 원림은 고즈넉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제 해가 기울었으니 오늘은 봉황이 날아오지 않으려는가 봅니다.”
문인주가 양산보를 마주보며 넌지시 물었다.
“다시 내일을 기약해야겠지요.”

양산보는 희미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고 괸 돌 쪽으로 걸음을 옮겨 계곡의 나무다리를 건넜다. 창암촌 그의 집은 계곡 건너 등성이 너머에 있었다. 문인주는 양산보에게 더 묻고 싶은 것이 있었으나 이미 발길을 돌려세운 그를 붙잡을 수가 없었다. 문인주는 도포자락 펄럭이고 노을을 바라보며 등성이를 넘어 집으로 돌아가는 양산보를 바라보다가 눈을 떴다. 그는 대봉대에서 얼핏 낮잠이 들었던 것 같다. 꿈에서 깨어나 대봉대에 앉아 있는 그의 머릿속에서 양산보의 마지막 말이 자꾸 맴돌았다. 그는 다시 내일을 기약하겠다는 양산보의 말을 음미해보았다. 어쩌면 양산보도 봉황이 그곳에 날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다시 내일을 기약하겠다는 그의 절절한 마음에 고개가 숙여졌다. 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간절하게 기다리는 그 마음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어쩌면 그의 기다림은 희망일지도 몰랐다. 그러면서 문인주 자신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렇듯 누구인가를 애타게 기다려본 적이 있었던가 반문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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