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당시 일본에는 유교 같은,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윤리관이 없었다. 임진왜란 무렵에야 후일 일본 유학의 교조로 불리는 후지와라 세이카가 유교의 교리를 전파하기 시작했다. 그전까지 서당은 물론이오, 훈장 선생도 없었다. 오랫동안 불교가 성행했지만 무사나 평민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이나 수행법은 배우지 못했고 절은 그저 위령제나 지내는 장의사 역할을 했다. 무사가 지배하는 난세가5백 년 넘게 지속돼 불교나 유교의 경전 대신 싸움질을 가르치는 손자병법이 유행했다. 그렇다 보니 이웃이 모두 적이었고 가족끼리도 서로를 믿지 못했다. 의리나 예의 같은 윤리는 생존에 외려 독이었고 하루하루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이어야 했다. 도덕률 보다는 필살기라는 생존 요령이 더 소중한 세상이었다.

“여기는 도리는 희미하고 이익만 밝은 곳인데…… 그런 무리들만 살아남을 수 있는 땅인데…… 이곳에서 물욕보다 의리를 따르라는 선친의 가르침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
“남이야 죽거나 말거나 나만 살면 되는 세상에서 스무 해를 버틴 제 심성이 아귀가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허허, 그런 정도란 말인가…….”

오윤겸은 길게 탄식을 터트렸다. 임란 때 정철의 종사관으로 봉직하면서 숱하게 왜인과 협상한 탓에 그들의 습성을 잘 알고 있었지만 막상 몽린의 술회를 듣고 보니 조선과 일본에서 산다는 것이 판이한 듯했다. 곁에서 잠잠히 듣고 있던 강우성은 훌쩍이다가 격하게 어깨를 떨었다. 임란 때 납치돼 일본에서 보냈던9년의 세월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하루의 생존을 걱정해야 했다. 종일 살아남는 데 전력투구하다 쇠 외양간 같은 곳에서 볏짚을 이불 삼아 쓰러져 자는 날의 연속이었다. 강우성이 돌아온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다.
도리가 있는 세상, 그래서 하루하루를 좀 편히 살 수 있는 곳에서 살고 싶다…….
그 이유 하나로 강수성도 사력을 다해 탈출을 궁리했고 결국 조선으로 되돌아왔었다. 오윤겸은 안쓰러운 눈빛으로 두 젊은이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그대 말은 충분히 납득하겠고…… 돌아가려는 이유가 하나 더 있다고 했는데 그것은 무엇인가?”
“물론 소쇄원과 창암촌이지요. 새소리, 바람 소리, 물소리…… 화초 향기, 따스한 햇살, 시원한 그늘…… 안개 숲 같았던 대나무 오솔길, 담장을 꿰뚫고 흐르는 시냇물, 그 물이 스스로 만들어 놓은 절구통…… 거문고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폭포수, 정자를 지붕처럼 덮은 노송, 쪽배처럼 떠있는 정자…… 작은 연못…… 큰 벽오동…… 물레방아…… 아, 몸서리치도록 꼿꼿했던 그 대밭…….”

몽린은 눈을 스스로 감았다. 쇼군이 쿄토에 갈 때 이용하는, 호사스러운 다옥에 적막감이 감돌았다. 모두가 신선이 노니는 정자를 떠올렸다. 오윤겸도, 강우성도 반쯤 꿈에 빠진 몽린의 회상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는가. 알 수 없는 적요가 널따란 다실을 꽉 채웠다. *

사신의 숙소를 빠져 나오자 몽린은 야스하루의 저택이 있는 주조지마(中書島)를 향해 부지런히 걸었다. 그 섬은 한때 히데요시의 거성이었고 지금 쇼군이 잠시 머물고 있는 후시미성 아래에 있는데 야스하루가 저택을 짓고 살면서 그의 관직명을 본떠 ‘주조님의 섬’으로 불렸다. 그곳까지는 약 10리 길인데 요도강을 따라 유곽, 점포, 민가가 즐비해서 밤 늦은 시간인데도 걷기가 수월했다.
곁에서는 왜인 무사 복장의 유명환이 긴 칼, 짧은 칼 두 개를 차고 따라 걸었다. 몽린과 동갑내기인 그는 창평에서 함께 피납돼 지난 스무 해 동안 생사고락을 같이 해왔다. 두 집안은 오래 전부터 일가친척으로 서로 얽혀 있었다. 양산보의 아버지 양사원이 서산 유씨의 집성촌인 광주 창교에 머물면서 사이가 돈독해져 명환의 조부인 유사가 양산보의 만장을 쓰기도 했었다. 정유년 당시 명환은 모친과 함께 창평의 인척 집에 머물며 고경명의 문하에서 공부하던 중이었다. 야스하루가 창평에 주둔하면서 몽린 일가와 함께 납치돼 이후 생사를 함께 했다. 나란히 걷던 명환은 칼을 끌어당기며 속삭였다.

“다옥에서부터 누군가 따르고 있는 데?”
“알고 있어. 두 놈인 것 같아.”

명환은 어려서부터 서책에는 뜻이 없고 말타기, 소타기, 무예를 배우는 데 열중했다. 창평에서 머물 때도 소를 타고 북산 자락을 제집처럼 뛰어다녔다. 큰 돌을 가득 실은 달구지를 끌고 산 아랫녘을 휘휘 돌고 오면 소도 명환도 땀에 흠뻑 젖어 너부러졌다. 그러다가도 새벽에는 소 등에 올라타 안개가 뿌연 들판을 내달리며 야호! 탄성을 터트렸다.
그런 기질 탓에 임란 당시 야스하루의 거성이었던 아와지에 도착하자 마자 조선에서 칼깨나 썼다는 어느 군관을 쫓아다니며 검법을 읽히는데 열심이었다. 그는 원래 칼춤이었던 본국검법을 쓰는데 발의 움직임이 바람과 같고 몸의 율동이 흐르는 물 같아서 한 번 당하고 나면 정신이 얼얼했다. 몽린도 그에게 무예를 배울 때 몇 번 대적했다가 혼쭐이 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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