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화>

“은개야.”
몽린이 손짓해 부르자 겁에 질려 육색이 하얗게 바랬던 은개의 볼에 살포시 홍조가 일었다. 몽린은 일가친척이 없는 그녀를 가엽게 여겨 한 가족처럼 대했다. 하대를 삼가고 주종 간에 같은 상에서 한솥밥을 먹을 때도 많았다. 언젠가 학질에 걸려 온몸이 불덩이 같았던 은개를 같이 사는 댁종들도 슬슬 피했다. 한데 몽린은 밥상을 들고 들어가 깨죽을 나누어 먹고 병자가 마시다 만 숭늉을 훌훌 들이켰다. 그때부터 은개는 몽린 도련님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던지 하겠다고 말하곤 했다.

어린 몽린의 뜻이 갸륵했지만 미심쩍은 양천운은 다그치듯 물었다.
“무슨 좋은 계략이 있는 듯한데 소상히 일러 보아라.”
“여기서 보면 입때 왜놈들이 소쇄원에 들어 오지 않았소. 예서 그곳까지 대략 오 리인데 은개가 말을 타고 가면 일각(십오 분)이면 다녀올 것이오.”
“참말이더냐? 그리 빨리…….” “거참 좋은 계교요! 어차피 걸어서는 못 간당께.”
양천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숙모가 거들고 나섰다. 하녀보다 남편의 목숨이 백배 소중하니까. 나어린 여자애를 보내는 것이 꺼림직한 양천운은 한참을 머뭇거렸다.
“만일 빠져나오기 전에 왜노들이 들이닥친다면 어찌하나. 놈들도 말을 타고 있을 것이야.” 그것까지 염두에 두었던 몽린은 뒤돌아서서 누군가를 불렀다.
“가응오리 아저씨가 어드메 계시오?”
난리통에 패랭이까지 챙겨 쓴 사내가 걸어 나왔다. 여진족 출신인 그는 인근에 소문난 벌메마니였다. 산벌들은 낭떠러지의 바위 틈에 꿀을 숨기지만 그를 못 당했다. 절벽 위에서 칡넝쿨을 타고 내려가 석청을 잽싸게 훔쳐 달아나곤 했다. 
“아저씨, 여기께에 땡비통 묻어 둔 것이 몇 개요?” “마흔 개쯤인디 뭣땀시 그런당가?”
가응오리는 눈을 말똥히 뜨고 물었다. 몽린은 가을이면 그의 벌통으로 새끼 곰을 잡으러 다녔었다.
“놈들이 걸어서는 은개를 못 따르오. 말을 타고 오는 놈이 있다면 땅벌로 해치울 수 있소. 왜적이 독침 맞고 비틀거리는 사이에 우리가 도망칠 수 있을 것이오.”
“아야, 시방 남은 시간이 없다. 빨리 가거라.”

숙모가 눈치껏 거들고 나섰다. 양천운이 차마 자기 대신에 어린 소녀를 사지로 보내자고 할 수 없을 테니까. 몽린은 눈앞에 펼쳐진 창평 들판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우짖는 새들이 허공에서 난무하고 넓은 들판이 아수라장이었다. 말이 뚜벅뚜벅 걷는 것이 한가해 보였다. 앞쪽에서 안 보일 뿐 뒤편의 옆구리에 은개가 찰싹 달라붙었다. 두 다리로 말 목을 그러안고 왼손으로 안장 뒤쪽을 바짝 잡았다. 말을 타되 몸을 숨기고 간다고 해서 마협장신(馬脇藏身)이라 했다. 사람이 말 옆구리에 매달려 거꾸로 끌려가는 자세이다. 잔꾀는 그럴듯했지만 이미 왜병들은 텅 빈 현청을 휩쓸고 나와 남녘 산자락에 위치한 향교와 소쇄원을 향하고 있었다. 와, 함성을 지르고 내달리면 바로 대숲에 이를 거리였다.

“벌통을 햇빛이 내리붓는 방향으로 일렬로 놓아야 한당께.”
그 시각에 몽린과 가응오리는 산 경사면에 심어 둔 땅벌통을 빼느라 분주했다. 애벌레에서 갓 태어난, 혈기왕성한 땡비들이 바글대는 통, 사십여 개가 언덕 위에 나란히 놓였다. 그 벌 세 마리가 동시에 침을 쏘면 잠자리가 즉사한다. 이삼십 마리가 머리를 쏘면 사람도 죽는다. 그토록 독한 땅벌군 수만 마리가 버티고 서서 왜적을 기다렸다.
한참이 지나 어느 남정네가 카랑카랑한 쇳소리로 외쳤다. “쩌어기…… 은깨가 나왔다.”
휴, 다행이다. 마을 입구를 가늠해 보고 있던 몽린은 가늘게 탄식했다. 하지만 옷자락은 안 보이고 까만 점 하나가 멀리서 보였다, 사라졌다 할 뿐. 그 점이 별안간 빨라지더니 뽀얀 흙먼지를 일으키며 내달렸다.
“저기, 저기에…… 왜, 왜, 왜놈들이닷.“
노복들이 기겁스레 외치며 덜덜 떨었다. 아녀자들은 은개에게 빨리 오라고, 손만 허우적거렸다. 난생 처음 죽음의 문턱에 선 자들이 응당 품는 두려움이었다.

멀리서 누리끼리한 황토 바람을 일으키며 말 서너 필이 은개를 쫓았다. 그 말 꽁무니를 따라 졸졸 달려오는 왜병들이 스무 명 남짓이었다. 나올 때는 은개가 말 등에 누워서 죽은 송장인 척했다. 횡와양사(橫臥佯死)라고 해서 실제 싸움터에서 적을 속이는 수법이다. 전쟁터에서 흔히 쓰는 속임수임를 눈치챈 왜적들이 검질기게 달려왔다. 적이 쫓아오는 것을 알아챈 은개는 벌떡 일어나 말 위에 우뚝 섰다. 말놀이 즉, 마희를 선 보일 때의 자세다. 사람과 달리 말은 다리가 동시에 땅을 박차고 오른다. 그 박자에 맞추어 말이 튀면 같이 튀어 올랐다가 말이 착지하면 사뿐이 내려앉았다. 이어 좌우칠보(左右七步)라 하여 말의 좌우를 넘나들었다. 말의 옆구리에 매달려 버선발이 땅에 닿을 듯 말듯 내달렸다. 그런 은개의 묘기는 본체만체하고 숙모가 마구 말을 더듬었다.
“서, 서, 서방님…… 왜, 왜놈들이…….”  “아저씨, 지금이오. 불을 붙여야 해요.”
몽린은 은개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소리쳤다. 근처 나무숲에서 주워 모은 잣나무 삭정이가 금세 활활 타올랐다. 소나무 송진까지 적당히 뿌려서 쉬이 연기가 올랐다.

적이 냄새를 맡았다. 돌아보지 말고 달려라……. 몽린은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은개와 적 사이는 이백 보 정도로 좁혀졌다. 왜병들은 사거리가 짧은 직궁을 사용해서 백 보 이내에 들어와야 쏠 수 있다. 그런 사정도 모르고 은개는 아직까지 죽은 척 누워 있었다. 말을 탄 무사들이 활에 시위를 거는 것이 어렴풋이 보였을 때였다.
“내 여기 있다. 어여 여기를 쏘아라.”
몽린은 벌떡 일어나 내달렸다. 적들이 활을 쏘면 은개가 죽을지 몰랐다.
“두 눈깔을 똑바로 뜨고 나를 겨누어라.”
몽린은 흰 동저고리를 벗어 이리저리 흔들었다. 양천운도 벌떡 일어나 환도를 빼어 들고 소리쳤다. “여여, 왜노들아, 여기에도 있다. 이쪽을 보거라.”
그는 어려서부터 활쏘기, 말달리기, 주먹과 발차기 등 무예를 읽혀 서툴게나마 칼을 쓰는 법을 알았다. 이어서 너나없이 목이 터져라 함성을 질렀다.
“와우…… 와우…… 와우우…….”
흰 옷을 펄럭이며 조선인들이 우뢰질을 하고 있으니 혹시 관군의 함정인가? 앞서 오던 기마 무사들이 말에서 훌쩍 내려 텃밭머리에 몸을 숨겼다. 뒤따라 오는 졸개들을 기다리는 듯했다. 평생 전장을 누벼온 적들은 역시 싸움에 능했다. 앞선 자들이 화살을 쏘는 사이에 다른 자들은 슬슬 기어서 언덕 아래까지 다가왔다.
“땅벌을 굴려 뿌러.”
우두머리가 돌격의 신호로 칼을 높이 치켜든 순간 가응오리가 외쳤다. 창암촌 식구들은 일제히 앞에 놓인 벌통을 발로 찼다. 언덕을 데굴데굴 굴러 내려가는 소쿠리 속에서 보기에도 흉물스런 벌집들이 통통 튕겼다.

저것이 혹시 조선인들이 잘 쓴다는 폭약이 아닌가?
난데없는 기물에 겁먹은 적들이 넙죽 엎드렸다. 그것들은 가응오리가 지옥보다 두렵다는 독종이었다. 임진년에 곽재우 장군도 조선의 땡비로 적을 괴롭힌 적이 있었다. 애벌레에서 막 태어난 벌이 한 통에 수천 마리씩 들어 있었다. 벌은 평생 한 번만 침을 쏘되 마치면 죽도록 태어난다. 벌통이 언덕을 구르자 수많은 벌들이 하늘로 솟구쳤다. 벌은 빛이 쬐는 방향으로 난다. 떠오르는 해가 왜병들 머리를 비추고 있었다. 햇빛의 방향을 감지한 순간 벌들은 우박이 내리듯 적을 덮쳤다. 땅벌은 열을 통해서 상대를 느낀다. 김이 모락모락 새나오는 콧구멍, 투구끈을 물어 뜨뜻한 침이 고인 입 속, 후키카에시(귀 가리게)로 가린 귓불, 미지근한 눈곱에 젖은 차양 아래 눈꺼풀까지 속속들이 파고 들었다. 투구 속으로 기어 들어간 땡비들이 후텁지근한 땀에 절은 머리통에다 독침을 꽂았다. “으아…… 으아으…….”
어이없게 벌레 따위에게 죽어야 하는 왜적들은 허망했을 것이다.
“대갈통에 서른 발만 쏘여도 골통이 퉁퉁 붓어 죽는당께.”

가응오리의 웃음소리를 뒤로 하고 몽린과 식구들은 산 정상을 향해 냅다 내달렸다. 몽린은 뭔가 아쉬운 듯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숯 검댕이처럼 검게 그슬린 연기가 소쇄원을 덮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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