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화>

다음날 오전쯤. 창평 공략을 마친 야스하루는 동헌 마루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몇 시각째 잠잠했다. 바람 한술 없는 날씨에 축 늘어진 우마지루시(대장기)가 을씨년스러웠다.  혹여 금성산성이나 광주에 은거한 관군이 급습할 경우에 대비해 정면에 동서로 서른 간, 남북으로 열 다섯 간 목책을 세웠다.
무사대장인 와키자카 카즈나가는 금성산성 아랫녘에, 후미를 맡은 타나카 야스요시는 동복으로 가는 길목에 배치해 당분간 체류할 준비를 완료했다.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를 총사령관으로 한 주력부대는 이달 19일에 전주성을 함락시켰고 충청도를 향해 간다고 들었다. 당분간 지원 부대가 없는 상황이어서 두어 달 창평에 머무르며 전라도로 내려오는 본대를 기다리기로 했다.
코쇼(시동)가 주는 도시락을 먹다 말고 야스하루는 신경질적으로 쏘아 붙였다.

“여덟 점 반(일본의 오후 세시)까지 곡마를 탄 여자애를 보내지 않으면 한 놈도 살려두지 않는다고 전해라.”
왜역관이 땅바닥에서 벌벌 떠는 노인에게 뭐라고 통역했다. 성질이 급한 야스하루는 은개를 잡으러 동복 방향으로 진격해 무등산을 뒤질 셈이었다. 그러자 수석 가로인 야스요시가 붉은 호로(갑옷 뒤에 걸치는 옷)를 펄럭이며 달려와 좀 지켜보자고 간했다.
“광주에 있던 전라 감사가 금성산성에 주력 부대를 숨겼다는 첩보가 있어서 잠시도 안심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앞은 험한 무등산이 가로막았는데 뒤에서 조선군이 밀려오면 퇴로가 막힙니다.”
부산포에서 꽤 오래 살았다는 왜역관도 거들고 나섰다.
“유교를 따르는 조선인은 우애를 중시합니다. 그렇게 배운 그 계집은 동헌 밖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저 이웃들을 보면 필히 내려올 것입니다.”
별수 없이 야스하루는 공격을 미루고 인근 지리를 잘 아는 창암촌 노인을 생포해 인근의 산을 뒤지도록 했다. 어제 말을 탔던 여자애만 내려오면 도망친 나머지 조선인은 살려주겠다는 조건으로. 어제 공격시 말을 타고 내달리던 은개를 지켜보았던 야스하루는 그녀를 찾고 있었다. 도시락 반찬으로 먹던, 말린 조개발을 질겅질겅 씹으며 어제 보았던 은개의 마희를 떠올렸다.
“아이고, 은개야. 우리 다 죽는다. 빨리, 빨리 내려오랑께.”
거꾸로 매달린 아낙이 종일토록 발악했다. 8월의 뜨뜻한 햇볕이 몇 시각째 땅을 데웠고 그 열기에 쬔 낯빛이 불그스레했다. 하도 몸을 비틀어서 손발을 묶은 노끈에 피딱지가 엉겼다. 억한 심정에 온몸을 구무럭거리며, 어이구, 어이구 건성울음을 흘렸다. 은개를 대신해 죽어야 한다는 것이 원통해 눈물이 장대비같이 쏟아졌다.

몽린 어미도 울부짖기는 마찬가지였다. 졸지에 천애고아가 될 혜란과 몽인이 불쌍해 종일 훌쩍거렸다. 새벽에 산책하는 습관이 있었던 덕분에 도망친 몽린이라도 살아남았으면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남편을 일찍 여읜 탓에 믿고 의지했던 자식과 이별이라고 생각하자 땅이 꺼지는 듯한 오열이 터져 나왔다.
왜병들은 다섯 보 간격을 두고 열십자로 각목을 이은 형틀을 세웠다. 일본에서 죄인을 사형할 때 흔히 사용하는 도구였다. 거기에 서른 명의 창암촌 사람들을 한 개에 한 명씩 묶었다. 왜병들은 일본에서 하던 방식대로 사람을 거꾸로 매달았다. 그냥 두면 피가 뇌로 모여 골이 터져 죽으니까 바늘로 귀 밑에 구멍을 뚫었다.
머리에 모인 피들이 시나브로 새어 나오게 하는 것이다. 가슴도 밧줄로 꽁꽁 묶었다. 그렇지 않으면 내장이 목까지 내려와 숨이 막혀 죽는다. 너무 세게 조였는지 묶인 아낙네들이 여러 시각째 꽥꽥, 마른기침을 뱉었다. 사람의 목숨은 질겨서 그렇게 두어도 닷새를 너끈히 버티는 사형수도 있었다.

야스하루는 왜 은개를 애타게 찾고 있을까.
본디 섬나라로 말 타기가 서투른 일본인에게 만주나 조선의 말놀이는 신묘했다. 일본에는 임란 때까지 곡마라 불리는 말놀이가 없었다. 조선군의 말 묘기를 구경한 왜병은 나중에 조선의 마상재를 본떠 곡마를 하는 여러 유파를 만들었다. 조선통신사가 일본에 갈 때도 마상 곡예를 전문으로 배운 병사를 데려가 기예를 선보일 정도였다. 본디 수군으로 큰 말을 타고 내달리는 육군을 부러워했던 야스하루에게 은개의 말놀이는 신비스럽지 않았을까.
은개는 걷기 시작하면서부터 관청의 목자였던 아버지를 따라 마구간에서 하루를 보냈다고 했다. 종일 백 필도 넘는 말들과 어울려 뛰어다녔단다. 창암촌에 와서도 말을 척 보면 어디가 아픈지를 알아내서 주인들을 놀라게 했다. 모두가 잠든 새벽에 소쇄원에서 기르던 말을 훈련시킨답시고 마을 앞동산을 쑤시고 다니기 일쑤였다. 흑갈색 베바지에 두건을 질끈 동여 매고 말을 내달리면 누가 봐도 남정네 같았다.

“어쩌면 난 말에게 시집갈지 몰라…….”
현감이 아끼는 부루(흰)말의 목덜미에 볼을 비벼대며 이렇게 말할 때는 좀 무뚝뚝한 몽린도 끽끽 웃곤 했었다. 솜씨가 널리 알려지다 보니 근래에는 활터에서 술잔치를 여는 관리들까지 그녀를 불러 말놀이를 구경했다. 곡마 혹은 말광대라고도 하는데 달리는 말 위에 서있다가 하늘을 보고 드러누워 말꼬리를 잡고 희롱하기도 하고 안장을 붙잡고 달리는 말의 등위를 좌로, 우로 넘나들기도 한다. 그런 은개의 묘기에 엔간한 야스하루도 넋이 나갔을 법했다.
여자가 신비스러울수록 더 정복하고 싶은 남자의 욕정이 끓어올랐을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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